[시론]정진영/경쟁은 하되 政爭은 안된다

  • 입력 2004년 4월 30일 18시 22분


과거에 여야 영수회담이라는 게 있었다. 대통령과 야당 총재가 만나는 회담이었다. 가까이는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7차례나 열렸다. 대통령은 이를 통해 국정운영에 대한 야당의 협조를 구할 수 있었고, 야당 총재는 그 대가로 야당의 고충 해결이나 자신의 지위 향상을 꾀할 수 있었다. 물론 상생의 정치, 민생정치, 국민통합과 같은 거창한 구호가 영수회담을 장식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회담은 알맹이 없이 끝났고, 뒷거래를 통해 이뤄진 합의는 잘 지켜지지도 않았다. 여야와 정부가 참여하는 정책협의회를 만들기도 했지만 몇 차례 토론만 하다가 끝나곤 했다. 그것이 과거 여야 대화의 실상이었다.

▼여야 대표회담, 국민에게 희망줘야▼

대통령 탄핵 국면과 17대 총선에서 원수 이상으로 싸우던 여야가 당 대표 회담을 연다고 한다. 같은 하늘 아래 살기를 거부할 것처럼 하던 사람들이 이제 싸우지 않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기 위해 만나겠다고 하니 환영할 만하다. 그래서 또 한번 기대를 해본다. 17대 국회에서는 여야가 경쟁은 하되 정쟁은 하지 말고, 협력을 하면서도 감시와 견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를 소망한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간의 회담은 과거의 여야 영수회담과는 사뭇 다르다. 대통령과 야당 총재의 만남이 아닐 뿐더러 여야 대표가 만나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다급한 현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두 사람은 소속 정당 내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확보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총선 후 두 당은 정체성을 둘러싼 당내 논란에 휩싸여 있다. 두 사람은 양당 내부의 온건개혁세력에 속한다. 정 의장은 보다 급진적인 개혁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고, 박 대표는 보다 완강한 보수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따라서 두 사람은 거의 비슷한 입장에서 여야 대표회담을 갖게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번 대표회담은 과거의 영수회담과 달리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여야 대표회담의 상징적인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다. 경제가 어렵고 국민의 마음이 갈라진 상황에서 여야 대표가 만나 상생의 정치, 민생 우선의 정치를 합의하는 것 자체가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여야 온건개혁세력의 당내 입지가 강화되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러나 두 대표의 회동이 한국정치가 안고 있는 고질병인 여야 대결과 정쟁 위주의 정치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치권의 움직임에는 벌써부터 과거로 회귀하는 모습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여권에서는 이미 누구는 입각하고 누구는 당을 맡는다는 식의 역할분담론이 무성하다. 직무정지 상태에서 탄핵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대통령도 이러한 과정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정분리와 당의 자율적 운영을 과거의 여당들과 자신을 구분하는 기준인 것처럼 주장하던 사람들이 어느덧 당정협의를 강조하고 당내 인사들의 입각을 거론하고 있다. 당에 개입하지 않겠다던 대통령도 당의 정책노선에 대해서는 할 말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여당은 확실히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야당도 비슷하다. 선거를 통해 야당 개혁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실감하고서도 과거에 집착하는 세력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당내 민주화로 ‘과거회귀’ 극복을▼

총선 이후 나타나고 있는 여야의 이러한 과거회귀 풍조 속에서 여야 대표가 한국정치 발전을 위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각 당의 내부를 완벽히 민주화하는 노력이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 개개인이 자유로이 국민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여야 간의 정쟁도 국회 파행도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대통령이 여당을 지배하고, 야당이 투쟁에 집착하는 한 한국정치의 고질병은 치유될 수 없다. 여야 대표는 민생 우선의 정치와 함께 확실한 당내 민주화를 국민 앞에 약속해야 한다.

정진영 경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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