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선거는…’ 선거민주제엔 ‘민주주의’가 없다

  • 입력 2004년 4월 23일 17시 28분


15일 제17대 국회의원 선출을 위해 대구 북구의 한 투표소에서 투표하는 한 가족. 저자 버나드 마넹 교수는 선거가 민주주의의 제도로 자리잡게 된 과정을 검토하며 독자들이 민주주의의 원리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동아일보 자료사진
15일 제17대 국회의원 선출을 위해 대구 북구의 한 투표소에서 투표하는 한 가족. 저자 버나드 마넹 교수는 선거가 민주주의의 제도로 자리잡게 된 과정을 검토하며 독자들이 민주주의의 원리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선거는 민주적인가/버나드 마넹 지음 곽준혁 옮김/302쪽 1만5000원 후마니타스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특성이요, 선거에 의한 선발은 귀족정의 특성이다.” (몽테스키외)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본질이다.” (루소)

이 책을 접하는 순간,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많은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선거가 민주정의 제도가 아니라고 설파했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으로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민주주의를 실현할 방법으로 추첨을 광범위하게 사용했으며, 민주주의의 반대자들이 선거를 주장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선거가 민주적인 제도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저자(미국 뉴욕대 교수)가 민주주의의 역사를 아우르며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인민이 대표를 선출할 권리를 갖는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라고 배워왔던 우리에게 이 질문은 그 자체로 충격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지금의 민주주의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 그리스의 정치철학을 대표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그들은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 군주정과 귀족정의 장점으로 민주정의 위험을 교정해야 한다고 보았던, 그리스 사회에 대한 비판론자들이었다. 반면 당시 그리스는 추첨을 통해 원하는 모든 시민이 공직을 맡을 수 있었고 또한 그것이 시민적 덕목의 하나로 강조되었던 사회였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잠재적 공직자가 됨으로써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간극을 없애고 인민의 통치를 실현하고자 한 정치체제였던 것이다.

‘대표자는 탁월해야 하며 선출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같은 상식은 불과 2세기 전 대의(代議)정부의 고안자들에 의해 민주주의의 원리로 탈바꿈했다. 인민이 언제든 공직자가 될 수 있었던 민주주의가 아니라, 군주나 귀족처럼 탁월한 사람들만이 대표로 선출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정치체제를 민주주의로 이해하게 됐다. 오늘날 우리는 대의제 고안자들이 민주주의라고 생각지 않으면서 만들었던 그 제도를 민주주의로 이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최근 한국사회를 둘러싼 변화들은 민주주의가 과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하게 만든다.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제도들이 민의에 반하는 결과를 낳아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들의 자율성은 어디까지 보장돼야 하는가, 그들이 민의를 배반할 때 선거권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런 시점에 이 책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민주주의를 잘 운용하는 것과 함께, 민주주의의 원리 자체에 대한 고민이 다시금 필요함을 일깨워준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민주주의는 어떻게 이해돼 왔으며, 역사는 서로 다른 정치원리를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바꿔 놓았는가. 이 책의 힘은 한 권의 역사서를 읽어 내리는 기분으로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서복경 국회도서관 입법정보연구관·정치학 stillhum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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