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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4월 20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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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상태에서 한 뼘만 움직여도 의회권력의 무게중심이 바뀔 수 있는 총선구도의 메시지는 뭘까. 무엇보다 고사 위기에 처한 의회주의를 소생시키라는 시대적 주문이 담겨 있다. 의회주의는 국민의 대표로 구성된 의회가 국가의사결정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헌법 원리로, 건강한 공론 형성을 위한 자유토론 및 타협과 양보에 바탕한 다수결원칙이 핵심 요소다.
▼보스도 없고 在野도 없다 ▼
한국의 민주화 진전은 반(反) 의회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으로 살펴볼 수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민주화의 첫걸음은 국회를 통법부(通法府)화한 권위주의 시절의 반의회주의적 독소를 제거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7년 민주화항쟁이 그 길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 총선은 우리의 의회주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몇 가지 중대한 전기를 마련했다.
3김 정치의 종언이 그중 하나다. 3김 공히 의회주의자임을 자처했지만 의회주의에 관한 한 공(功)보다 과(過)가 크다는 점에서다. 그들의 보스정치는 국민의 대표가 아닌 계보의 조직원을 양산했고, 그들의 막후정치는 민주적 의사 결정 구조를 왜곡해 심대한 국정파행을 초래했다. 또한 그들의 비타협 정치는 우리 사회 도처에 굵고 깊은 균열을 남겼다.
3김은 무대에서 퇴장했지만 한국 정치가 타성에서 벗어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구태정치와의 단절을 강조해 온 여권의 주류 역시 아직 그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보스정치 막후정치와의 결별 의지는 강하지만 비타협적인 기류는 조금도 약화되지 않은 듯해서다.
또 하나의 전기는 ‘민주 평등 해방의 새 세상’을 지향하는 민주노동당의 원내정당화다. 이는 3김 정치의 종언 이상으로 정치체제의 본질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한국적 정치상황의 독특한 산물인 재야정치권의 전면적인 제도권 편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개량주의’라는 진보진영 일각의 비판을 무릅쓰고 정치세력화를 시도했기에 더욱 관심을 끈다.
민노당의 원내 진입으로 장외정치의 영역은 축소되고 장내정치의 영역은 확대될 게 틀림없다. 국회의 국민 대표성도 강화될 것이다. 반면 체제 내 이념대결은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민노당이 국회 등원 후에도 계속 특정계층의 이익 대변에 치우친다는 인상을 줄 경우 그럴 가능성은 한층 크다.
어렵게 맞은 기회를 살려 의회주의가 뿌리 내리게 하려면 타협과 양보의 자세가 필수다.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한 노무현 대통령이 우선 ‘야당과의 대화’를 약속한 취임사를 펼쳐 들고 초심(初心)을 떠올렸으면 한다. 돌아보면 노 대통령이 재신임 여부를 직접 국민에게 묻겠다고 한 것부터가 대의기관인 국회를 존중하는 의회주의적인 발상은 아니었다.
▼의회주의가 상생의 정치다▼
여야는 상호 배려와 공존의 원리인 의회주의가 상생정치의 첩경임을 인정했으면 한다. 따라서 최소한 상대방의 얘기를 경청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줬으면 한다. 그래야 모처럼 정치권에 쏠린 국민의 기대를 붙잡아 둘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서로 자기주장만 하면서 삿대질로 지새운다면 또 다시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 당선자 299명의 각오다. 이들이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규정한 헌법 조항을 새기고 또 새겼으면 한다. 의원 각자가 당리당략과 당론에 얽매인다면 의회주의는 애당초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임채청 편집국 부국장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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