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반병희/총선 ‘바람… 바람… 바람…’

  • 입력 2004년 3월 28일 19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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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구입하면 어쩔 수 없이 4년은 사용해야 한다. 사용해 보기 전까지는 불량품인지 규격품인지 식별이 어렵다. 마음에 안 들어도 AS나 반품이 안 된다.” 총선 때마다 나오는 우스갯소리다.

17대 총선도 변한 게 별로 없는 듯하다. 바람 탓이리라. 찬(贊)탄핵 반(反)탄핵 바람, 노란잠바 파란잠바 바람, 정동영 박근혜 바람, 공판장당사 천막당사 바람, 느닷없는 대구 경북 사랑 바람.

온통 바람뿐이니 정책대결이나 인물론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개혁을 화두로 선명성 경쟁을 할 때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바람의 힘을 굳건히 믿고 있는 모 당은 당초 수도권 공천에서 탈락시킨 인사를 이웃지역으로 출마지를 바꿔 줬다가 마침내 전남 지역에 공천한다. 전과 3범의 관록에서 심지어 중형 선고를 받고 수감 중인 인사들도 바람을 기대하고 줄줄이 출마 의사를 밝힌다.

바람은 또 다른 희극을 낳고 있다. 모 당의 서울 강남권 30대 무명인사는 정치 입문 한 달도 안 돼 여론조사에서 쟁쟁한 경쟁 정당 후보들을 압도하고 있다. 당사자조차 “이러다 진짜 국회의원 되겠네”라며 스스로 놀라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바람을 불게 하는가.

20세기 불가리아계 지성 엘리아스 카네티는 정치적 상징(바람) 조작을 ‘권력 이전에 따른 착시현상’과 권력 이전 과정에서 파생된 부조리를 감추기 위한 의도된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권력 장악자는 계속 약자인 것처럼, 주류에서 밀려난 세력은 아직도 강자인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실제로 그렇게 착각해 군중몰이에 나선다는 설명이다.

사실상의 여당으로 의회 권력의 한 축인 열린우리당이 탄핵안 처리 때 애국가를 부르며 국민에게 눈물로 절절히 호소하고, 의원직 사퇴를 약속했다 이를 뒤집은 것은 ‘약자임’을 전제로 한 권력 신주류의 정치적 상징조작(바람 일으키기)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교직사회 내의 신주류로 평가받고 있는 전교조가 탄핵반대 집단행동에 나서고, 노무현 대통령이 실정법을 위반(선관위 해석)했음에도 계속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 역시 권력 전이 과정 중에 일어난 바람에 힘입은 것이 아닐까.

반면 한나라당은 이미 보수진영의 대표성을 상실했음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착각해 수적 우위를 내세워 무리하게 탄핵안을 밀어붙이다 역풍을 맞았다. 권력 전이를 깨닫지 못한 대표적 착시 현상이다. 박근혜 바람이나 천막당사 바람도 이런 착시현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상징조작인 셈이다.

여야의 이런 상징조작과 바람몰이에 휩싸이다 보니 각 후보의 정책 비전과 리더십을 검증하겠다는 분위기가 사라진 지 오래다.

후보자들의 자질과 능력, 정책 비교가 차지해야 할 유권자들의 마음에 계속 바람이 몰아친다면 이번 선거에서도 ‘일단 구입 후 4년간 후회’라는 시행착오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국민은 또다시 한국정치 발전을 위해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 바람을 몰아내는 일은 국민의 몫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왔다가 스치고 지나가며 날 울려 놓기만 하는 바람’이라는 대중가요 노랫말이 적용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반병희 정치부 차장 bbhe4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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