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그런데 어떤 일 하세요’

  • 입력 2004년 3월 5일 19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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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 재임 때의 일이다. 일일교사로 찾아간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어린이의 질문을 받았다. “제가 한 여학생을 좋아하는데 제 친구도 그 애를 좋아해요. 사랑과 우정 중에서 뭘 선택해야 하나요?” 대통령이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끝내 쟁취해야지요.”

▷웃음이 터지는 얘기지만 곱씹어 볼 대목도 없지 않다. YS는 사랑도 민주화투쟁처럼 쟁취하는 것으로 여긴다든지, 사랑이라는 개인적 혹은 절대적 가치를 우정 신의 같은 집단적 가치보다 중시한다든지. 지금쯤 성년이 됐을 그 초등학생은 대통령의 가치관까지 엿볼 수 있는 답변을 끌어낸 탁월한 질문자였던 셈이다. 엊그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한테 그 못지않은 질문을 던진 여고생이 등장했다. 정 의장의 일일교사 특강이 끝난 뒤 질문 받는 시간에 수줍게 손을 들고 물었다는 거다. “그런데 어떤 일 하세요?”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해석이 복잡하게 나돌고 있다. 첫째는 알고도 물었다는 분석이다. 이 경우 정 의장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는, 올해 최고 유행어를 능가하는 코미디라는 찬사가 뒤따른다. 정치란 무엇이며 정치인이 뭘 하고 있나를 따지는 심오한 철학과 힐책이 담겼다는 분석도 있다. 네티즌들은 “나도 정 의장이 뭘 하는지 모르겠다. 재래시장에 자주 가는 걸 보면 슈퍼마켓 차리려는지”라며 ‘이벤트 정치’를 꼬집거나 “나도 모든 정치인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식의 정치 허무주의적 반응으로 여고생의 ‘거사’에 동참 중이다.

▷다른 갈래의 해석은 여고생이 정말 모르고 물었다는 것이다. 문상객이 한참 울고 난 뒤 “그런데 누가 돌아가셨나요?” 하는 꼴이다. 이 경우에도 ‘주제 파악을 잘하자’는 수학능력시험용 교훈이 나올 수 있다. 정치에 대해선 연예스캔들 절반 정도의 관심도 없는 학생들이나, 청중의 눈높이 파악은커녕 자기소개도 제대로 않고 듣기 좋은 소리만 늘어놓는 정치인이나, 누가 티코냐 리무진이냐 가릴 것 없이 오십보백보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뛰기만 하는 이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가끔 멈춰 서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그런데 어떤 일 하세요, 지금?”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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