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 칼럼]예술이 경쟁력이다

  • 입력 2004년 3월 5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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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자동차 번호판이 촌스럽다는 논란으로 한동안 시끌벅적하더니 축구대표팀의 유니폼 디자인이 새로 도마에 올랐다. 자동차 번호판은 마치 ‘죄수 번호’ 같다는 소리를 듣고 있고, 축구대표팀 유니폼은 어색하고 썰렁한 느낌이다. 디자인이 좋은가 나쁜가를 둘러싼 논쟁은 권장할 만한 일이다. 낙후되어 있는 디자인 수준을 높이는 데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불량 디자인 왜 나오나 ▼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는 거리의 간판들만 보아도 국내 디자인 수준은 세계 12위라는 경제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초라하고 부끄럽다. 그러나 이 문제는 디자인 분야에 한정지을 게 아니라 문화예술 전체로 시각을 넓혀 바라볼 필요가 있다.

디자인 수준이 낮다는 것은 국민 전체의 예술적 감각이 떨어진다는 말과 같다. 달리 말해서 국민의 예술 감각이 높아지면 디자인 수준도 높아질 것이다. 따라서 차 번호판을 만든 공무원을 질책하기보다는 우리의 미의식, 즉 아름다움을 분별하는 능력을 높이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게 현명한 접근이다.

지난해 상영된 한국 영화 ‘스캔들’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에로틱한 줄거리보다는 조선시대 의상 가구 건축물 등 전통의 아름다움이었다. 영화 속에 등장한 우리의 옛 옷은 단아한 자태와 빼어난 색감으로 보는 이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었고 옛 집은 조화와 기품을 뽐냈다. 물론 영화 제작진이 전통미를 잘 이끌어낸 덕분이기도 하지만 우리 문화는 과거 세계적 수준을 자랑했다. 그러나 요즘 문화의 침체는 이런 ‘문화민족’의 자부심이 무색해질 정도로 장기화되고 있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입시교육과 그에 따라 초중고교에서 예술교육이 실종된 점을 지적하고 싶다. 예술교육은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에 이뤄져야 효과적이다. 우리 청소년들은 밤낮없이 영어 수학 공부에 매달려 있으니 이들 앞에서 예술이라는 말을 꺼내기조차 어려운 현실이다.

대학생이 된 다음 예술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곳에 있다. ‘예술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감상을 위해서는 상당기간 훈련을 거쳐야 한다. 처음 접한 판소리가 쉽게 이해될 리 없으며, 셰익스피어 연극을 보는 눈이 갑자기 뜨일 수 없다. 난해하고 따분한 것이 문화라는 인식이 한번 뇌리에 심어지면 다음부터는 문화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이런 악순환이 지난 수십년간 지속되어 왔으니 결과는 뻔하다.

예술교육이 전문적인 예술가를 양성하기 위해서나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큰 오산이다. 예술교육은 요즘 선진국들의 뜨거운 화두다. 미국은 21세기 인재양성 플랜의 일환으로 예술교육을 강화하고 있고, 프랑스는 2000년부터 초중고교를 상대로 예술교육 5개년 계획을 진행 중이다. 프랑스 교육부는 예술교육이 프랑스 교육개혁의 중심이라고 공언할 정도로 의욕을 보이고 있다. 영국과 독일은 20세기 초부터 예술교육에 공을 들인 나라들이니 말할 것도 없다.

▼선진국 예술교육에 담긴 뜻 ▼

이들 국가에서 예술교육에 발 벗고 나서는 데는 예술 말고도 다른 목적이 있다. 21세기 인재가 갖춰야 할 능력이 창의력과 상상력이라는 점은 누구나 공감한다. 이들 국가는 학생들을 예술가와 만나게 해 주거나 예술행사를 관람하게 하고 직접 예술활동에 참여하는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이를 통해 얻어지는 능력은 심미적 정서적인 판단력과 자신을 드러내는 표현력이므로 21세기 핵심 재능과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당장 사교육비 문제도 해결 못하는 우리 형편에선 ‘딴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예술교육이 반드시 ‘가야 할 길’임에는 틀림없다.

한국의 예술교육은 확대는커녕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학교에서 찬밥 취급을 받으며 자꾸 밀려나고 있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선진국 진입이나 ‘문화민족’으로의 복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예술을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바라볼 때가 됐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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