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표정훈/새해엔 ‘독서계획표’ 짜보자

  • 입력 2003년 12월 19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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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젊은 세대가 영위하는 문자생활의 대부분은 더 이상 책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다양한 정보통신기기를 통해 이뤄진다. 책장을 넘기는 손길보다는 휴대전화 자판을 누르는 손가락이 우리 시대의 익숙한 풍경이다. 이른바 다매체시대에 책의 위상은 폭풍우 몰아치는 황야에서 풍찬노숙하는 리어왕을 보는 듯 안쓰럽기까지 하다. 여기에 불황이 더해졌기 때문일까? 올 한 해 우리 출판계의 일기는 전반적으로 ‘흐림’이었다.

▼‘한눈에 반하는 책’ 흔치않아 ▼

주식시장에 견준다면, 매수세가 부진한 가운데 분명한 장세 주도주도 없었고 별다른 호재도 없이 개별종목장세가 지루하게 펼쳐졌다. TV 주말오락프로그램 ‘느낌표’의 독서 캠페인 코너가 일종의 기관투자가 혹은 큰손 역할을 했지만, 그 공과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채 올해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출판계야 그렇다 치고, 한 해가 저무는 이때 우리들 각자의 독서 대차대조표는 어떤 상황인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일단 양적으로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또 질적으로는 읽은 책 가운데 만족스러웠던 책은 어떤 것이었는지, 지적으로 혹은 정서적으로 크게 도움이 된 ‘결정적 한 권’은 없었는지,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하려 애썼는지, 한 분야에 편중된 독서를 하지는 않았는지, 자녀의 독서 생활에 신경을 썼는지. 이런저런 사항들을 가만히 돌이켜보는 것이다. 그 결과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그 대목을 해소하는 내용으로 내년 한 해의 독서 계획을 세워 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물론 우연하게 만난 책과 단번에 불꽃이 튀어 진한 사랑을 나누는 경험도 좋다. 하지만 그런 사랑은 흔치 않을뿐더러 그 상대가 책인 한, 꾸준히 준비하는 사람에게나 허락되는 경험이다. 책의 에로스는 로고스와 늘 함께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독서 계획을 세우는 일은 책의 에로스를 맞이하기 위해 길을 닦고 청소하고 단장하는 로고스의 일이며,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지적 훈련이기도 하다.

가장 야심 찬 독서 계획의 예로는 필립 워드의 ‘평생 독서(A Lifetime's Reading)’를 들 수 있다. 동서고금의 명저 500권을 망라하고 있으며, 계획대로라면 50년 동안 모두 읽게 되어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의 ‘독서분월과정(讀書分月課程)’을 들 수 있다. 아침에는 유교 경서, 낮에는 사상서, 저녁에는 역사서, 밤에는 문집을 읽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으니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빡빡하기 그지없다. 방학생활계획표가 치밀할수록 계획을 지킬 가능성도 낮아지지 않던가. 결국 각자의 처지와 취향과 목적에 따라 여유 있는 계획, 실행 가능한 계획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

예컨대 중점 독서 분야 같은 것을 정하여 해당 분야의 입문서에서부터 전문적인 내용의 책까지 차례로 읽어 나가는 방법도 좋다. 매년 분야를 바꾸어가며 그렇게 하기를 여러 해 거듭하다 보면, 스스로를 눈을 비비고 다시 보는(괄목상대·刮目相對)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비단 개인뿐 아니라 학교나 기업, 나아가 국가 차원에서도 전체적인 실력과 경쟁력 향상을 꾀한다면, 그 성원의 체계적인 독서를 제도적으로 권면하는 게 지름길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정도로 책을 읽었다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정도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라는 토머스 홉스의 말은 당연해 보이면서도 결코 범상치 않다.

▼계획 세우는 것도 지적 훈련 ▼

책 좀 읽어야지 생각하면서도 그동안 책과 너무 멀리 떨어져 지낸 탓에 망설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를 애당초 책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단정해 버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윈스턴 처칠이 1932년에 출간한 산문집에 실린 ‘취미’라는 글의 일부를 떠올려 본다. ‘설령 책이 당신의 친구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당신과 일면식이 있는 관계로 묶어둘 수는 있지 않은가. 설혹 책이 당신의 삶에서 친교의 범위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한다 해도, 알은체하며 가벼운 인사 정도는 반드시 하고 지낼 일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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