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칼럼]한나라당, 뭘 믿고 이러나

  • 입력 2003년 11월 17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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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이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지구당을 폐지하겠다, 후원회도 없애겠다며 개혁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거야 등 떼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일 테고 정작 관심은 내년 총선일 텐데 요즘 같은 모양새로도 과반수의 원내 제1당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고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겉으로만 보면 믿는 구석이 있을 법도 하다. 여당이 둘로 쪼개져 싸우는 만큼 지금의 소선구제에서는 가만히 앉아서도 어부지리를 얻을 만하고, 대통령이 제 아무리 영남출신이라 한들 전통적 지지세력인 영남표가 크게 흔들릴 리 없다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 ‘3野 편대’면 필승이라지만 ▼

그렇게만 흘러간다면 사실 별 걱정 안 해도 될 일이다. 그러나 그건 틀에 박힌 희망사항일 뿐이다. 유권자 의식을 3김 시대에 묶어놓고 자기들 좋을 대로 하는 셈법이다. 물론 한나라당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생각이 짧은 것은 아니다. 분권형 개헌을 하고 중대선거구제를 받자던 ‘홍사덕 파문’도 뒤집어보면 나름의 총선 필승전략일 수 있다. 총선 필승구도의 핵심은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을 끝까지 떼어놓아 ‘3야(野) 편대’를 유지하는 것. 그러자면 비록 청와대와 우리당 식성에 맞는다고 해도 민주당을 잡아두기 위해 소선거구제를 버릴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기야 여기에는 개인의 정치적 계산이나 지역구 사정에 따른 의원별 이해관계도 복잡하게 얽혀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홍사덕 총무 같은 전국구 의원이 지역구로 나가거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수도권 의원의 경우 중대선거구제가 되면 2등을 해도 의원배지를 달 수 있으니 내심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속내가 어떠하든 한나라당 내의 이런 움직임이 대다수 국민 눈에는 ‘이 사람들 지금 정신이 있나’ 하는 정도로 비친다는 점이다. 대통령 측근비리에 대한 특검을 밀어붙인 거야 나름대로 명분이 있다고 치더라도 지금 한나라당이 무슨 분권형 개헌을 떠들고 ‘3야 편대’에 매달리고 있을 때냐는 것이다.

이런 여론에 밀려 분권형 개헌 얘기는 잠시 묻히는 모양이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한나라당이 당장 해야 할 일은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비리 수사에 제대로 협조하는 것이다. SK그룹에서 100억원을 받은 전 재정위원장(최돈웅 의원)이 검찰의 추가소환을 피해 몸을 숨기고, 사실상 대선자금을 총괄했던 전 사무총장(김영일 의원)이 ‘표적수사’ 운운하며 검찰출두를 거부하다 마지못한 듯 검찰에 나가서야 한나라당이 백번 ‘석고대죄’를 한다고 한들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국민은 드물 것이다.

이러니 특검이든 분권형 개헌이든 불법 대선자금 비리의 초점을 흐리려는 ‘물타기 정략’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대통령 측근비리 전담기구’를 만들자고 해봐야 말발이 먹히지 않는 것이다. 제 때부터 씻을 일이다.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에서 ‘굉장한 것’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기대와는 달리 별게 안 나올 수도 있다. 그럴 경우 특검은 오히려 한나라당에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상대적으로 한나라당의 허물만 돋보이게 될 거라는 얘기다.

또 하나, 지금이야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앙앙불락이지만 민주당과 우리당이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한-민 공조 가능성에 비해 결코 낮지 않다.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어부지리를 얻는 것을 호남표가 그냥 구경만 할 리 있겠는가. ‘DJ의 선택’은 여전히 결정적 변수가 될 수 있다.

▼시대 흐름에서 신호 읽어야 ▼

이래도 한나라당이 ‘믿는 구석’이 있다고 자신할 텐가. 한나라당이 뭘 믿든, 그것이 여전히 유효할지 여부는 결국 유권자가 심판할 일이다. 다만 진실로 정치개혁을 얘기하자면, 진정 이 나라가 질적으로 발전하기를 원한다면 한나라당은 크게 달라져야 한다. ‘3야 편대’로 총선에서 이길 궁리나 하는 수준에서 변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믿는 구석’마저 등을 돌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한나라당이 믿어야 할 것은 스스로 거듭나지 못한다면 미래가 없다는 사실이다. 시대의 흐름에서 그런 신호조차 읽지 못한대서야 어찌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겠는가.

전진우 논설위원실장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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