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하태훈/'불법 정치자금' 사면 안된다

  • 입력 2003년 11월 9일 19시 28분


불법 정치자금 수사팀을 보강한 검찰의 칼끝이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한 재계와 일부 정치권이 고백성사론을 내세워 위기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보험성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에 대한 사면 가능성의 운을 떼자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법 정치자금 고백 후 일괄 사면’을 주장하고 나섰다.

▼정-재계 ‘고백론’ 초법적 발상 ▼

불법 정치자금 수수는 기업과 정치권력간 정경유착의 증거다. 우리 기업들은 대체로 그 정경유착의 수혜자였다. 그런데도 지금 재계는 정치권의 압력과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임을 자처하면서 재계에 대한 수사 시 국가경제에 파장이 미치리라는 상황논리를 펴고 있다. 이는 기업들이 부정한 과거를 세탁하려는 후안무치한 주장이다. 선호하는 정당에 정치자금을 지정해서 기탁하는 지정기탁금제를 도입하자는 제안도 결국은 재계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재계와 정치권 일각, 그리고 대통령의 대선자금 공개 후 사면론은 게다가 현실적으로나 법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다. 종교적 고백성사는 양심의 가책이라도 담보할 수 있지만 과연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 닥쳐올 불이익을 감수하고 모든 죄상을 낱낱이 고백할지는 극히 회의적이다.

그 점에서는 돈 받은 정당이나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내년 총선을 코앞에 두고 한 표가 아쉬운 터에 누가 나서서 자기 죄를 스스로 알릴 것인가.

대통령의 제안 또한 탈법적이고 초법적인 발상이다. 물론 사면권은 사면법에 따라 행하는 국가원수의 헌법상 권한이며 통치행위다. 그러나 사면이 너무 자주 정치적 목적으로 행사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 침해를 제거해주는 법의 안전판이 아니라 마치 군주시대 국왕의 시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 권한 남용이 문제되는 것이다.

정치자금 수사와 처벌은 현저히 정의 관념에 반하는 것도 아니어서 사면의 이념에도 맞지 않는 경우다. 더구나 대통령 자신이나 측근이 관련됐거나 관련될 수 있는 비리 사건의 경우에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한다면 진실이 은폐될 위험마저 안고 있는 것이다.

사면권은 입법과 사법을 뛰어넘어 국가원수에게 인정된 고유권한이라는 점에서 법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법칙 없는 ‘기적’이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은 불법 대선자금에 관한 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사면이라는 기적을 일으킬 권한이 없다. 또한 공소권을 소멸시키는 일반사면은 국회의 동의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정치인이 자신이 관련된 사건의 사면에 동의권을 행사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부하는 꼴이다.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일괄 사면은 형평성도 문제이거니와 국민의 법 신뢰를 훼손하는 것이다. 정치권에 제공된 불법 정치자금은 분식회계를 통해 조성된 비자금일 것이요, 이는 그만큼 기업의 주주들에게 손실을 끼쳤다는 얘기가 된다. 이 부분에 대한 면책까지 특별법으로 제정하자는 것은 국가 개입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며 법률만능주의이자 위헌적인 발상이다. 국민은 기업의 민사상 책임을 면해주는 특별법 제정권한을 국회에 위임한 일이 없다.

사면론과 관련해 기업들이 수사에 협조하고 관련 사실을 고백하면 입건을 유예하거나 약식 기소하겠다는 검찰의 선처 방침도 문제다. 검찰이 기소재량권을 갖고 있다지만 이 경우 기업으로 하여금 특정 정당에 대한 자금 제공 사실만 선별 고백하도록 유도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편파성 시비를 낳을 수 있다. 미국의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처럼 법치국가가 정의를 거래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용서의 전제는 ‘진실-참회-다짐’▼

불법 정치자금 관련 당사자들이 진정 죄를 사면받기 원한다면 검찰이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힐 수 있도록 수사에 협조하는 한편 철저한 자기반성 속에서 정치개혁에 힘써야 한다. 용서의 전제는 진실과 참회이며 앞으로의 다짐이다. 그런 모습을 보일 때에만 불법 정치자금의 피해자인 국민은 기업과 정치인을 믿고 포용하면서 그들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라는 사실을 깊게 새겨야 할 것이다.

하태훈 고려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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