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445…잃어버린 계절(1)

  • 입력 2003년 10월 19일 17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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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를 껴안고 나무문을 열자, 양갱 포장지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나미코는 발치에 구르는 종이를 주워 읽었다. 일본군 항복하다. 어떻게 된 거지, 이런 삐라를 그냥 놔두다니, 나미코는 겁이 나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감시병은 서 있지 않았다. 혹시, 이거, 사실? 정말 전쟁이 끝난 거야? 일본이 졌어? 나미코는 삐라를 움켜쥐고 방안으로 들어가, 한 글자 한 글자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읽었다. 일, 본, 군, 항, 복, 하, 다. 지난 사흘 동안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아버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끝났어! 전쟁이 끝난 거야!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삐라를 쥔 손도 파르르 떨렸다. 나미코는 이불 밑에 손을 집어넣고 가토 중사에게서 받은 빨간 부적과 미즈노 소위에게서 받은 은시계와, 빈 깡통 속에 모아둔 군표를 꺼내 주머니에 쑤셔넣고, 고하나 언니 장례 때 입었던 검정 비단 치마와 하얀 저고리로 옷을 갈아입었다.

나미코는 복도로 나와 번호가 붙어 있는 나무문을 하나하나 두드렸다. 나무문으로 얼굴을 내민 여자들은, 다들 잠옷 차림에 피로와 잠으로 얼룩진 표정이었다.

“일본군이 항복했어, 일본이 전쟁에 졌다고. 요 며칠 동안 병사들이 한 명도 안 왔잖아. 감시병도 없고, 지금이야, 도망치자. 이런 데서 이런 꼴로 있으면 일본 사람이라고 죽이려 들 거야. 도망치자!”

그러나 여자들의 표정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놀람도 기쁨도 없었다. 몸이 안 좋아. 몇 년이나 안 걸었잖아, 다리에 힘이 빠져서 멀리까지 도망치는 거 힘들어. 도망쳐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잡히면 끝장인데. 넌 아직 젊고 기운 있으니까 도망쳐, 소리 없이 나무문이 닫히고 여자들은 다시 번호가 적힌 각각의 방에 틀어박혔다.

나미코는 아직 열지 않은 3번 방문을 열고, 시든 무궁화꽃처럼 누워 있는 에미코의 무릎을 흔들었다.

“에미코 언니, 전쟁이 끝났어요. 일본이 졌어요. 같이 도망가요.”

2년 만에 조선말로 얘기하는데, 대답은 일본말이었다.

“자궁도 난소도 난관도 다 들어냈어. 안도씨도 전사했고. 그 사람 군복 벗으니까 등에 모란 문신이 있더라고. 하지만 얼마나 친절했는지 몰라.”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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