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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10월 17일 17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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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윤기씨는 “30∼40대에는 경험의 재해석이 문학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며 “상상력이 다른 상상력을 점화하고 때론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 그것이 문학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미옥기자 salt@donga.com
◇내 시대의 초상/이윤기 지음/203쪽 8000원 문학과지성사
이윤기씨(56)가 최근 네 번째 창작집 ‘노래의 날개’와 다섯 번째 장편소설 ‘내 시대의 초상’을 한꺼번에 내놨다. 소설가이자 번역가, 신화연구가 등 여러 개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소설가 소리 듣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그를 16일 경기 과천 자택에서 만났다.
작가는 “창작집은 가슴으로 미시적으로, 장편소설은 머리로 거시적으로 썼다”며 “굳이 두 책을 같이 낸 것은 각기 다른 두 세계를 아울러야 한다는 일종의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소설집에는 ‘스치듯 지나가는 순간’을 그린 단편 9편을, 연작 장편소설집에는 ‘왕조-양반-조직-유목’으로 대별되는 시대의 변화를 담아냈다.
●숨은 그림 감추기
현재 미국 시카고에서 공연 중인 장사익은 떠나기 전 작가에게 짧은 엽서를 보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 노래 ‘봄날은 간다’를 신곡으로 정할까 하는데 허락 부탁합니다.”
함께 만나는 자리에서 ‘봄날은 간다’를 꽤 잘 부르곤 하는 그에게 예를 차렸던 모양. 작가는 이렇게 답을 보냈다. “새가 먹이를 구하는 데 돈이 드나요. 슬픔의 세계에서는 우리 모두 무전취식자니 마음대로 하시오.”
“슬프지 않고서는 아름다운 일이 없다”는 작가의 새 창작집에서는 슬픈 기운이 뚝뚝 묻어난다. 매년 참가하는 단군제에서 한 친구가 새벽녘 불더미에 뛰어들고(‘옛 이야기’), 박정만 시인은 죽기 4개월 전 몸에서 시체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향수를 배에 쏟아 붓는다(‘전설과 진실’).
슬픈 세계에서 작가는 구구절절 풀어 이야기하거나 결국에는 아귀를 딱딱 맞춰 독자의 의문을 해소해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 작가는 ‘각기 다르게 읽히는 소설’을 꿈꾸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들을 읽고 평론가들은 ‘So What?’이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유대계 독일 평론가 발터 벤야민은 ‘번역이란 언어 대 언어의 대결이 아니라 한 언어가 다른 언어를 슬쩍 스쳐 지나가는 순간 모든 의미가 전달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내가 소설에서 지향하는 바도 이와 같아요. 작가는 해설하지 않고, 독자 역시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소설을 읽는 것이죠.”
●비상(砒霜) 든 소설
작가는 자신과 언어예술의 궁극인 시 사이에 소설이, 소설과 자신 사이에 신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 길을 통해 ‘심금(心琴)의 현’을 울리는 한 편의 노래,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노래’를 지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제가 소설집 ‘두물머리’로 대산문학상(2000)을 받는 시상식장에서 이청준씨가 어깨를 무겁게 치더니 ‘이 사람아, 절창이데 그려’ 하시더군요. 그런 ‘절창’을 세상에 몇 편 남기기를 소망하는 거죠.”
30세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청탁이 밀려와 덜컥 겁이 난 그는 글쓰기의 다른 방식으로 번역 일을 시작했다. 이제는 셀 수도 없지만 그의 이름을 달고 나간 번역서가 200종이 넘는다. 번역을 하면서 글쓰기를 배웠고, 그러면서 문학의 깊은 우물을 파 들어가니 그곳에 신화가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번역이나 신화연구는 문학으로 가는 도정(道程)일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창작집 표제작에는 ‘비상(砒霜·독약)이 든 책’에 관한 전설이 나온다. 소설 속의 ‘나’는 두보의 시 ‘석호리’, 김병연의 ‘한식날 북루에 올라 읊다(寒食日登北樓吟)’를 읽으면 ‘가슴이 아프고 속이 쓰린다’.
“박수근의 그림, 소월의 시, 장사익의 ‘찔레꽃’을 보거나 들을 때 애간장이 끊어집니다. 그게 비상이 든 노래고 그림이죠. 소설에도 비상이 들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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