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이승엽 신화가 되다…56호 홈런

  • 입력 2003년 10월 2일 19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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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이승엽 국민타자 이승엽이 2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삼성-롯데전에서 아시아 홈런 신기록인 56호 홈런을 친 후 동료선수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대구=연합
'56' 이승엽 국민타자 이승엽이 2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삼성-롯데전에서 아시아 홈런 신기록인 56호 홈런을 친 후 동료선수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대구=연합
하얀 잠자리가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윙∼.” 이제 막 태어난 하얀 잠자리의 날갯짓은 더할 수 없이 요란했다. 마치 지구 끝까지 날아갈 듯한 기세였다. 대구구장을 가득 메운 팬들은 숨죽이고 잠자리의 비행을 지켜봤다. 56번째로 태어난 순백색의 잠자리는 6개의 대형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제 어디에 앉을까. 잠자리는 목표지점을 정했다. 수많은 잠자리채와 뜰채가 나풀거리는 좌중월 담장과 펜스 사이의 공간. 잠자리는 날갯짓을 멈추고 착륙에 들어갔다. 이윽고 잠자리가 사뿐히 땅에 내려앉았다. 2003년 10월 2일 오후 7시. 아시아 프로야구에 새 역사가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잠자리의 고공비행에 감탄한 1만2000명의 관중은 일제히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56발의 폭죽과 324개(개인통산 홈런수)의 축포가 대구구장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고 어금니를 질끈 문 이승엽은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사부’인 박흥식 타격코치가 1루에서 그를 안았다. 3루에선 전 삼성 동료였던 롯데 3루수 김태균이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상대팀 선수지만 아낌없이 축하해주는 흐뭇한 장면이었다.

이승엽 56호 축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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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플레이트를 밟은 이승엽은 더그아웃 앞에서 동료들의 환영을 받았다. 좀처럼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김응룡 감독도 나와서 손을 마주친 뒤 껴안았다. 그는 이승엽에게 “장하다”라고 말했다. 한국야구의 대표적인 강타자였던 김 감독 역시 후배의 대기록 달성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료들과의 하이파이브와 포옹을 마친 이승엽은 마지막으로 포수 현재윤을 껴안고 기쁨을 함께 나눴다. 후배 현재윤은 지난해부터 이승엽의 룸메이트로 그동안 홈런이 나오지 않자 누구 못지않게 마음고생을 한 선수다.

이제 이승엽만 그라운드에 홀로 남았다. 그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이승엽”을 연호하는 팬들의 환호에 답했다. 그 모습은 마치 아시아를 품에 안고 포효하는 사자를 연상케 했다. 일본 프로야구의 오 사다하루가 39년간 간직해 온 아시아 시즌 최다홈런의 전설은 이 27세의 청년에 의해 다시 쓰였다.

경기 전 그는 “독기를 품었다”고 했다. 또 “내가 가진 기량을 모두 롯데와의 마지막 경기에 쏟아붓겠다”고 했다.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한편 삼성 김응용감독은 평소와는 달리 더그아웃 밖으로 뛰쳐나올 정도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김감독은 경기 후 이승엽의 메이저리그 예상 성적을 묻는 질문에 "정확한 성적을 예상할 수는 없지만 올해 마쓰이 히데키 만큼은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대구=김상수기자 ssoo@donga.com

정재윤기자 jaeyuna@donga.com

▼"홈런 약속지켜 행복"▼

이승엽은 경기가 끝난 후 부인 이송정씨를 뜨겁게 껴안았다. “56호 홈런을 아내에게 바치겠다”던 그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다음은 이승엽과의 일문일답.

―56호 홈런을 친 소감은….

“정말 기분 좋다. 아내가 오늘 아침 식사할 때 지금까지 55개 쳐준 것만도 고맙다면서 홈런 못 쳐도 괜찮으니까 부담 없이 치라고 했다. 올해 대구에서 안 좋은 일(지하철사고를 의미)이 있어 당시 희생된 분 가족들에게 올 시즌 동안 멋진 홈런을 치는 것을 보여드리려고 다짐했다. 그 결실을 거둔 것 같아서 정말 기쁘다.”

―타석에 들어설 때 기분은….

“사실 생각도 못했다. 첫 타석에서 홈런이 안 나왔으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몇 게임째 홈런이 안 나오니까 나뿐만 아니라 박흥식 타격코치님도 초조했던 것 같다. 박 코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제 가장 기억에 남는 홈런은 무엇일 것 같은가.

“물론 이번 홈런이다.”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은….

“부모님께서 아픔 없이 키워주시고 운동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다. 앞으로도 장한 아들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 경기에서 홈런을 치다니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오랫동안 기다려주시고 한결같이 응원해주신 팬들과 국민 모두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홈구장이어서 마음이 더 편했던 것 같다. 대구 홈팬들께 특히 감사드린다.”

―앞으로 다짐은….

“이제 개인성적은 끝났으니까 포스트시즌에서는 팀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정재윤기자 jaeyuna@donga.com

▼이송정씨 인터뷰▼

“기쁨보다는 가슴속에서 울컥했어요.”

이승엽의 아내 이송정씨(21)는 벅찬 감격을 누르지 못한 표정이었다. 이씨는 홈런이 터지는 순간 “공이 넘어갈 수 있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며 모처럼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씨는 이날 점심으로 남편에게 장어구이를 해줬다. “장어를 먹으면 홈런을 치는 날이 많았다”는 게 그의 설명. 하지만 야구장으로 떠나는 남편에게 “오늘은 홈런을 치지 말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그동안 친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으냐는 의미.

“그동안 너무 안쓰러웠어요. 오늘은 새벽까지 잠도 제대로 못자고 결혼 후 처음으로 가위에 눌리더라고요.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어요.”

이씨는 경기가 끝나면 무슨 말을 해주겠느냐는 물음에 “안아주겠다”고 답했다. 하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대구=김상수기자 s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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