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입신의 경지에 오른 이세돌 9단

  • 입력 2003년 7월 20일 17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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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진을 찍으려하자 머리를 깎지 않았다고 후회했다. 이달초 후지쓰배 결승전 이전 머리를 깎으려했다가 왠지 불길해 그냥 뒀다는 것. 자기 주장이 거침없는 그도 징크스를 갖고 있다. 박영대기자
그는 사진을 찍으려하자 머리를 깎지 않았다고 후회했다. 이달초 후지쓰배 결승전 이전 머리를 깎으려했다가 왠지 불길해 그냥 뒀다는 것. 자기 주장이 거침없는 그도 징크스를 갖고 있다. 박영대기자
이세돌 9단(20)은 2001년 32연승을 달리며 ‘불패(不敗) 소년’으로 불렸다. 이후 그는 LG배 세계기왕전 후지쓰배 등 세계대회만 3차례 우승해 최강의 반열에 올랐고 최고단인 9단에도 올랐다. 이제 더 이상 그를 소년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색하다. 최근 서울 한국기원에서 만난 그는 앳된 외모에도 한 분야의 고수에게서 엿볼 수 있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는 9단이 된 소감에 대해 “너무 늦게 받은 것 아닌가요”라며 웃었다. 세계대회 우승은 곧 입신(入神)의 기량을 의미하는데 첫 우승(2002년 후지쓰배) 때 받을 수 있지 않았느냐는 항변이기도 했다.

그는 최근 농심배 예선에 참가하지 않았다. 주최측이 예선을 거치지 않고 본선에 진출하는 와일드카드를 이창호 9단에게 줬기 때문이었다. 그는 와일드카드에는 확실한 잣대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창호 9단이 받은 와일드카드가 언짢다는 게 아니라 무원칙에는 승복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당돌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스타일이다. 이로 인해 이세돌 9단은 자주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파격’적인 행동을 실력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그의 장기는 전광석화 같은 수읽기와 화려한 공격. ‘매우 자유로운 바둑이어서 대응하기 쉽지 않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상황에 따라 유연하면서도 자기 스타일대로 바둑을 이끌어나간다.

그는 빠른 수읽기보다 정확한 수읽기를 강조했다.

“빨리 보는 건 웬만하면 다 합니다. 문제는 정확성이죠. 5수까지는 정확하게 내다볼 수 있는데 그 이상은 모르겠어요.”

물론 이 다섯 수를 보기 위해 수십∼수백가지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

“2001년 초 수읽기가 잘될 때는 7, 8수까지 봤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수읽기가 예전만 못해요.”

고작 20세에 수읽기 능력과 관련해 나이를 들먹인다.

“제 경험으론 20세가 되면 수읽기나 실력이 늘지 않아요. 경험이 쌓일 뿐이죠.”

그는 2001년 LG배에서 이창호 9단에게 2 대 3으로 역전패한 것이 경험 부족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경험의 유무는 산 위에 있느냐 밑에 있느냐는 것과 비슷해요. 산 위에 있으면 돌 같은 것을 던지기 쉽잖아요. 밑에 있으면 던지기도 힘들지만 위에서 떨어지는 돌을 피하기도 어려워요. 그런 차이예요.”

그는 후지쓰배 결승에서 송태곤 5단을 만났을 때 우승을 믿었고 한다. 경험의 차이 때문이다.

그의 바둑은 화끈한 공격 스타일이어서 아마추어들이 좋아한다. 이세돌 바둑이라면 꼭 본다는 바둑 팬들도 많다.

“제가 공격을 하는 것은 통상 불리하기 때문이죠.”

유리할 때도 안전한 길로 가지 않고 공격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공격하면 재미있습니다. 다만 그 공격이 확실한 효과를 볼 때죠.”

아마추어가 볼 때는 ‘왜 무리하나’ 싶지만 머릿속엔 공격 수순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상황이 이미 끝나있다는 것이다.

상극(相剋)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정확히 수를 읽고도 수를 내지 않는다는 이창호 9단에 비해 이세돌 9단은 모험을 즐긴다.

이창호 9단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다면 이세돌 9단은 뛰어난 탄력 때문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같다.

그는 아직 세계 1인자라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이창호 9단이 태산처럼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성적으로 말해야죠. 내 목표는 내년까지 모든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는 거예요. 거의 불가능합니다만 해보고 싶어요.”

누구도 선뜻 드러내기 어려운 목표다. 그 목표는 세계대회에서 20연승쯤 거둬야 이룰 수 있다. 싱긋거리는 입술 사이로 그의 독한 마음이 전해졌다.

예전과 달리 주위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는 그는 아직 휴대전화가 없다. 그는 “휴대전화를 장만하면 여자친구 생긴 줄 아세요”라고 농담을 던졌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동료들이 말하는 “이세돌은 이런사람”

김승준 8단=이세돌 9단은 튀는 성격이지만 유머가 있고 활달해 동료와 잘 지낸다. 프로 기사들은 공식석상에서 쑥쓰러워하는 편인데 이 9단은 그렇지 않다. 조훈현 9단과 바둑도 닮았지만 그런 면도 비슷하다.

조한승 6단=승부욕이 강해 다른 게임에서도 좀처럼 지지 않는다. 몸을 쓰기보다 앉아서 하는 게임에 강하다. 다른 게임에서도 불리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힘이 있다.

목진석 7단=개성이 뚜렷하고 자기 주관이 강하다. 성적을 내기 전까지 경솔하고 실수가 많았는데 성적을 낸 이후 신중해지고 상대의 실수를 유도하는 능력이 생긴 것 같다. 그와 바둑을 둘 때 싸움이 붙거나 약한 구석이 생기면 무척 껄끄럽다. 이창호 9단이 집바둑을 잘 짜는데 비해 이 9단은 싸움 바둑을 잘 짠다.

최규병 9단=이세돌은 이창호 시대를 가로막는 거대한 산맥으로 성장했다. 그의 강인한 기질이 이창호와 버금가게 한 것이다. 하지만 농심배 예선불참같은 문제는 신중했어야 했다. 실력대로 하자는 그의 주장은 맞는 말이지만 이창호 9단의 와일드 카드에 시비를 건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물론 본 뜻은 그렇지 않았다. 앞으로 한번 더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견해도 듣는 성숙함을 겸비해야 한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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