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 입력 2003년 6월 20일 17시 19분


코멘트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석기용 옮김/510쪽 2만3000원 이마고

“신과 인간 앞에 가혹한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어. 누구인지도 모를 이에게 고통을 주고 인류 전체에 해를 끼칠 기술을 소망하다니.”

16세기 베네치아의 수학자인 타르탈리아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벌 받을 일’이란 탄도학(彈道學) 연구였다. 포탄의 낙하지점을 정확히 산출하는 그의 공식은 당시 상상할 수 없었던 명중률을 보장해주었다.

핵개발 계획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이것은 너무도 강력해서 앞으로의 전쟁을 억제할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이런 낙관적 전망은 근대 이후 새로운 무기체계가 수립될 때마다 등장했다. 미국 중서부 사막에서 실시된 초기의 핵실험.동아일보 자료사진

타르탈리아는 제후와 귀족들의 무기 연구 제의를 줄곧 거부해왔다. 그러나 이제 오스만튀르크가 베네치아의 코끝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늑대가 양떼를 넘보고 있다.”

그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고 베네치아는 구원됐다.

인간이 무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뒤 전쟁과 과학기술은 줄곧 친근한 벗이었다. ‘디펜스 사이언스’ 등 군사 관련 저널에서 활동해온 저자는 인류역사상 군사 관련 신기술의 변혁과 과학기술자의 협력을 일목요연하게 조감한다.

1415년, 프랑스 정예군은 지리멸렬해 보이는 영국군과 마주쳤다. 200야드 앞에 멈춘 프랑스군은 경멸의 뜻으로 엉덩이를 까보였다. 순간 영국군 진영에서 무수한 화살이 날아들었다. 프랑스군이 듣도 보도 못한 신무기 장궁(長弓)이었다. 두 시간도 되지 않아 갑옷 입은 기사들이 이끈 ‘1000년의 군사체계’는 괴멸됐다.

35년 만인 1450년, 프랑스군은 영국군 앞에 다시 섰다. 프랑스군은 쇠단지 안에 검은 가루와 돌을 쑤셔 넣었다. 곧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수백개의 돌덩이가 영국군을 향해 날아왔다. 화약의 전성기가 개막되는 순간이었다.

한 가지 무기의 우월성에 도취된 집단은 새로운 변혁을 맞아 역사의 주인공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기관총도, 전차도, 전투기도 전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매번 경악은 잠시뿐이었다. 기원전 260년, 로마는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카르타고의 전함 한 척을 포획, 해체했다. 3개월 동안 로마는 똑같은 배를 220척이나 복제했고 이어 카르타고를 바다에서 쓸어버렸다. 적의 무기에는 특허권이 적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매듭지은 핵폭탄도 마찬가지였다.

군사기술과 ‘민수(民需)’기술은 언제나 같은 몸통의 두 얼굴이었다. 튼튼한 창과 갑옷을, 깨지지 않는 대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철강 기술의 진보를 불러왔다. 통조림의 발명은 무적의 나폴레옹 원정군을 낳았다. 암호 해독의 필요성은 컴퓨터의 발전을, 단절 없는 군사통신망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인터넷을 낳았다. 전투기 개발 경쟁 덕에 우리는 빠른 제트기로 세계여행을 즐긴다. ‘살육의 기술’은 ‘풍요의 기술’로 전용돼 왔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타르탈리아는 조국의 급박한 요청에 따라 ‘평화주의’의 양심을 꺾었지만 모든 과학자가 전쟁기술과 관련해 내면의 갈등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 갈릴레이는 연구비가 부족하자 망원경을 들고 베네치아 총독을 찾았다. ‘적 함선을 일찍 발견할 수 있는 물건’을 처음 본 총독은 상금을 듬뿍 내렸고, 갈릴레이는 연구를 이어갔다.

질소비료로 전세계의 밭을 풍요하게 만든 ‘질소고정법’의 아버지 하버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사령부의 부름을 받았다. 그가 만든 것은 ‘참호에서 적을 몰아낼 수 있는’ 염소가스였다. 그러나 독가스의 발명자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다. ‘전시에 과학자의 책무란 조국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그는 당당히 밝혔다. 그러나 유대인이었던 하버는 나치 집권 후 추방의 비운을 맞았다.

“국가와 과학자 사이의 계약은 파우스트적이다. 국가에 충성을 하는 한 과학자들은 사랑받고 보상받게 되어 있었다.”

하버는 파우스트적 계약을 하고도 배신을 당했지만 몇몇 과학자는 계약에 저항했다. 무선통신의 아버지 마르코니는 무솔리니의 협력 제안을 뿌리쳤다. 소비에트의 물리학자 카피차는 핵개발 그룹을 뛰쳐나왔지만 숙청을 피해 노벨 물리학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파우스트처럼 영혼을 팔아넘긴 천재가 훨씬 많았다. 일본 731부대의 책임자 이시이는 살아남아 일본의 전염병학 발전에 기여했고, 다하우수용소에서 유대인을 진공실에 처넣은 스트럭홀트는 미국의 보호 아래 ‘우주개발의 공헌자’ 중 한 사람이 됐다.

인간 유전자 해독이라는 과학사의 기념비적 결실마저 ‘바이오 살상기계’의 단서로 의심받는 오늘, ‘살육의 기술’은 ‘풍요의 기술’과 어디까지 동행할 것인가.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