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254…입춘대길(15)

  • 입력 2003년 2월 27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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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뜰에는 널을 놓고

밥상 내고 잣을 까고 호두 깨고

언니와 노는 널뛰기를

나는 좋아해요, 아주 좋아해요.

미령은 딸의 손을 잡고 노래하면서 소아과 의원, 약국, 백화점, 이불집, 포목점 앞을 지나쳤다. 일본 사람이 하는 가게는 문을 열었지만 조선사람 가게는 닫혀 있다. 일본사람은 양력으로 정월을 쇠고 조선사람은 음력으로 정월을 쇤다. 미령은 고무신가게 앞에 이르러 노래와 발걸음을 멈췄다. 나무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유리문 안에 창호지를 발라 안쪽 일은 알 수가 없었다. 딸 손을 꼭 쥐고 문 쪽으로 돌아본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목구멍에 있는 것 같다. 꼭 개구리처럼 목구멍이 벌룩벌룩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 나오면 어쩌나. 그 여자? 그 여자의 아들? 아들의 각시? 상을 당하셔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라고 머리를 숙이면서 나와 이 아이에게도 같은 위로의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상을 당해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라고.

“엄마.”

부르는 소리에 눈을 돌려보니 딸이 좀 떨어진 곳에서 물이 가득 찬 잔을 들고 있기라도 한 듯 온몸이 굳어져 있었다. 미령은 딸을 안아 올려 인절미보다도 보드라운 얼굴에 입을 맞추고 내 귀여운 딸, 나만의 귀여운 딸, 아이고 왜 이렇게 귀여울까 라고 뺨에 뺨을 비벼대며 주인을 여읜 집의 문에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강변에서는 계집애들이 널뛰기에 신이 나있었다. 잘한다! 오른쪽 계집애가 널 위를 뛰어올라 검은 치마가 봉긋 펴졌고 더 높이! 왼쪽 계집애가 뛰어올라 감색 치마가 소용돌이쳐, 잘한다! 웃음소리와 환성이 들린다…그래도…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귓속에서 윙윙 울리고…텅빈 집…부재중…내 안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그 사람을 향한 마음은 지금도 넘치고 있건만…어째서 내가 없는 건가…나는 어디에 가버린 걸까.

“쭈쭈.”

“…소진이는 아직 쭈쭈 못해요. 저 언니들만큼 큰 다음에, 알았지.” 미령은 딸을 끌어안고 뒤꿈치를 축으로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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