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이태동/문화 살찌우는 ‘미술품 기증’

  • 입력 2003년 2월 7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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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성탄절, 시인 이흥우씨와 기업가 김낙준 조재진씨가 박수근의 스케치 작품과 유화를 강원도 양구에서 새로 문을 연 ‘박수근미술관’에 기증한 뜻깊은 일이 있었다. 이어 최근에는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대표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이중섭의 유화와 근대미술작품 50여점을 제주 서귀포 이중섭전시관에 기증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로써 세상 사람들은 숨어 있던 박수근의 그림 세 점과 더불어 이중섭이 제주도에서 그린 ‘섶섬이 보이는 풍경’ ‘연과 아이’, 그리고 은지화(銀紙畵) 두 점 등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게 됐다.

▼개인소장품 미술관으로▼

무엇보다 기쁜 점은 이 소식들이 우울하리만큼 척박했던 우리의 기증문화 풍토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미술품의 경제적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이렇게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은 사회적 측면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세상사람들은 자연의 맹목적 움직임과는 다른 인간 정신의 표상으로서 미술품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게 됐으며, 그것을 영원히 지킬 수 있게 됐다. 위대한 미술품에 대한 소유욕을 버린 사심(私心) 없는 기증자들의 희생정신은 또, 예술작품을 금전으로 환산해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어 기증문화의 불씨를 지필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었다.

예술가들의 혼이 담겨 있는 미술품을 비자금이나 보석처럼 벽장 속에만 감추어 두거나 묻어 두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경우에 따라 값비싼 미술품을 가진 소장가들도 그것의 재산가치보다는 미술적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고 작품에서 많은 정신적 자극을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2세가 같은 길을 걸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어느 해 겨울, 필자는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에서 두 번이나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한번은 눈앞에 펼쳐진 무수한 그림 속에 담긴 인간적 모습에서 느껴지는 미학적인 충격이었다. 특히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인간의 표정이나 역사와 싸우는 인간의 의연한 모습을 청동에 조각한 미술품들은 나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인간의 표정이나 모습 가운데서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진귀한 일순을 포착해 청동으로 영원히 고정시켜 놓은, 위대한 조각가의 노력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번의 충격은 그 곳에 전시되어 있던 세잔, 고흐, 피카소, 샤갈, 로댕 등의 값비싸고 진귀한 미술품 아래에 기증자의 이름을 새겨놓은 수많은 명패들을 발견한 데서 오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기증받은 미술작품들로 이루어진 미술관이 비단 워싱턴 국립미술관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러한 현상은 그해 겨울 내가 찾은 보스턴 시립박물관과 하버드대 미술관을 비롯한 유수의 다른 대학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풍경이었다. 나는 지금도 미국 남부 어느 명문대학의 그리스식 도서관 건물 현관 끝에 마련된 벽감(壁龕·장식을 위하여 벽면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공간) 속에서 ‘인간 정신’을 표상하며 횃불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날개 달린 맨발의 여인상에서 받았던 감동만큼이나 그 아래에 빛나던 기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황금빛 금속판의 강렬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다음 세대에 미학적 감동을▼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결코 그것을 창조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들을 아끼고 보존하는 데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 있어야 현실로 남게 되는 것이다. 아무쪼록 이 나라에도 선진국에서와 같이 열린 마음을 가진 많은 미술애호가들이 나타나 닫힌 공간에 숨겨졌던 위대한 미술품들을 열린 공간으로 꺼내어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깊은 미학적 감동을 전달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들 한국의 독지가들이 이번에 일으킨 기증문화의 불씨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를 바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분들이야말로 미술품의 참된 가치를 세상에 알리는 전령이자 파수꾼이라 하겠다.

이태동 서강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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