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시인의 편지-유혹' "인터넷 텃밭에 서정의 씨"

  • 입력 2002년 12월 27일 18시 26분


◆시인의 편지-유혹/정일근 글 사진/160쪽/1만원/새로운눈

‘첫눈 같은 시인의 편지’가 책상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누구를 사랑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일도 사랑의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미지의 그대에게 보냅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뜨거운 고백 함께 넣어서.’(시인의 말)

울산을 지키는 시인 정일근(44·사진)의 편지다. 1992년 일간지의 주재기자로 울산 생활을 시작한 그는 “10년 만에 울산사람 다 돼 버렸다”며 너털웃음을 웃는다.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시인의 편지는 본디 홈페이지 ‘다운재(茶雲齋·www.ulsan21.com)’에 연재했던 글들이다. ‘다운재’는 ‘차와 구름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인터넷상의 공간. 오프라인에도 같은 이름의 작은 공간이 있다.

1999년에 문을 연 인터넷 ‘다운재’에 그는 직접 찍은 한 장의 사진과 그에 어울리는, 길지 않은 글을 꾸준히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글 쓰는 연습이라 여겼다.

진눈깨비가 날리는 밤, 주황색으로 번진 외등 불빛을 사진에 붙잡아 둔 그는 누군가를 쓸쓸하게 기다리던 어느 날을 회상한다.

‘길 위의 생이란 기다림의 이음동의어라는 비밀 하나를 알아버렸습니다.…아직도 그대의 주소는 끝없이 이어지는 내 유년의 골목 안에 있고 나는 눈 내리는 저녁, 마음에 외등 하나 밝히고 그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눈 내리는 외등 아래서)

“계산하지 않고, 풍경에서 시를 읽어냈습니다. 가슴으로 느낀 풍경을 사진 찍은 뒤 글을 쓰지요. 그러다 보니 촌놈이 열어 놓은 허름한 사이트에 4000명 이상이 찾아와서 글을 읽고 가더라고요. 인터넷의 ‘인’자가 인연을 뜻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촘촘하게 얽힌 뉴런처럼 초고속통신망이 도시를 장악한 이 세상에서 그는 매일같이 ‘접속’을 이어나간다. 그에게 네트워크 세계는 인간과 소통하는 또 하나의 장이다.

“인터넷 e메일 문자서비스가 일상화되더라도 이를 통해 따뜻한 사람들의 온기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방이 아닌 서정이 있는 곳, 사이버 공간에 서정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는 디지털카메라의 렌즈를 피사체에 과감하게 들이댄다. “초보라서 그렇다”는 그에게 사진작가 김아타가 “사진이 참 좋다”고 칭찬해주었다 한다. 시인은 그저 “좋아하는 풍경을 담는 것뿐”이란다. 저녁의 푸른 안개 속에 드러난 울타리, 자운영꽃, 푸릇푸릇한 쑥, 고운 연분홍물들인 모시, 타오르는 가을 잎새와 시인은 공존한다.

다홍빛 책표지에 흘려 쓴 글씨, 책 제목은 낯설게도 ‘유혹’이다. 왜일까.

“붉은 산딸기가 주는 유혹 같은 그런, 자연의 유혹 말이에요.”

‘…이제 우리 사이에 얼마 남지 않은 지상의 시간 서로의 상처 덧나지 않게 따뜻하게 감싸안으며 회산다리에 섰던 처음처럼 그렇게 사랑하고 싶습니다.’(우리는 만나야 합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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