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토요일에 만나는 시/박성우 '거미'

  • 입력 2002년 11월 8일 18시 36분


나희덕
박성우의 ‘거미’(창작과비평사)는 첫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일찌감치 세상에 단풍 든’ 영혼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방구석에 거미줄을 치고 있는 거미처럼, 물 위에 떠다니다 햇볕에 말라버릴 개구리밥처럼, 시인은 세상에 ‘간신히’ 뿌리를 대고 있다.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공중의 길’(‘거미’)이나 ‘헛물켠 시간들’(‘개구리밥’)만이 그를 세월의 방죽 위로 떠오르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헛짚은 날들’은 역설적으로 그가 얼마나 세상에 뿌리내리고 싶어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몸에서 뽑혀져나온 슬픔의 점액이 맑으면서도 탄성(彈性)이 강한 것은 그것이 허공에 대한 오랜 응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일하기에는 넓은 방이 좋고 잠자기에는 좁은 방이 좋다는 바슐라르의 말도 있듯이, 박성우의 시적 몽상은 주로 고치와도 같은 방에서 이루어진다. ‘어둠이 두꺼운 이 방은 커튼으로 가려야 할 창문이 없’고, ‘물기가 깊게 뿌리를 내린 이 방의 벽면’엔 검푸른 곰팡이가 피어 있다. 그 가난한 방을 ‘어두워서 좋은 방’(‘방’)이라고 그는 말한다. 아니, 어쩌면 그 좁고 어두운 고치나 껍질 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다 세상으로 나오는 날에도 ‘걷는다는 표현은/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민달팽이’). 잔뜩 웅크린 채 처진 어깨를 다리로 삼아 ‘닳아질 희망의 뒤축’도 없이 끈질긴 보행을 계속하는 민달팽이의 모습은 그대로 자신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시는 자폐적이고 우울한 내면의 기록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감상에 빠지지 않고 가난과 죽음에 대한 풍부한 사유로 이끌어간다. 퍼석퍼석한 사료를 먹는 개들을 향해 ‘저 개들은 몇 그램의 죽음을 포식한 걸까’(‘몸에 맞는 그릇’) 묻는다. 먹고 사는 일 자체가 죽음을 삼키는 일이며 죽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동안 열심히 먹은 죽음을 토해낼’ 수 있다는 인식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런 슬픈 유전은 가족사를 다룬 시편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옛 집터의 톱질 당한 감나무를 보며 ‘아버지 안에서/나는 그렇게 베어졌다’(‘감꽃’)고 말하는 시인에게 아버지는 삶의 비극성을 가르쳐 준 존재이다. 그 비극은 결국 성탄전야에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인공호흡기를 뽑는 일에 동의했어요’(‘친전’)라는 탄식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 불화의 기억을 뚫고 해학과 기묘한 건강성이 드러날 때가 있다. 예컨대 시인이 조교로 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가 미륵산에 간다며 하루 종일 풀을 뽑고 돌아와 ‘뭐허고 놀긴 이놈아, 수박이랑 깨먹고 오지게 놀았지’(‘어머니’) 대답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이렇게 슬픔과 해학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서 그려내는 삶의 음영은 깊고 서늘하다. 그리고 서정과 서사를 적절하게 결합시키고, 시점과 화자를 조율하는 솜씨는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을 보여준다. 그 역시도 언어의 오랜 되새김질에서 나왔으리라.

나 희 덕 시인·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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