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커스]페미니스트 계간지 ‘이프’ 박옥희 발행인

  • 입력 2002년 10월 8일 18시 49분


잡지 '이프'를 통해 유쾌한 페미니즘 유포에 주력하는 박옥희 발행인은 남성 주류 사회에 '딴죽'을 거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 신석교기자
잡지 '이프'를 통해 유쾌한 페미니즘 유포에 주력하는 박옥희 발행인은 남성 주류 사회에 '딴죽'을 거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 신석교기자
페미니스트 계간지 ‘이프(if)’의 박옥희(朴玉嬉·52) 발행인. 그는 싸움에 일가견이 있다.

30여년 전. 여기자가 생소하던 시절 그는 여자 사진기자였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생생한 한 컷을 건지기 위해 그는 정치판과 경찰서를 헤집고 다니며 남자 기자들과 살벌한 ‘어깨싸움’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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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후. 신체적 접촉은 필요없지만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바꾸기 위한 싸움이다. 그는 여성학을 학문의 전당에서 끌고 나와 일상의 문제로 가공해 사람들 눈앞에 들이대는 데 성공했다.

1997년 여름 선을 보인 잡지는 지난해 흑자로 돌아섰다. 올해 순익은 지난해보다 200% 이상 늘어난 1억5000만원 정도에 이를 전망. 대형잡지들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1년에 네 번 발행하는 ‘운동권 잡지’치고는 괜찮은 성적이다. 그는 광고상의 문제로 발행 부수는 밝히지 않았다. ‘이프’는 지난해 한국잡지협회의 ‘10대 우수 잡지’에 선정되기도 했다.

안티미스코리아 대회를 4회째 개최해 온 그는 올해 미스코리아 중계를 지상파 방송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그는 생리대 논쟁에 불을 붙이고 있다. 이렇게 주류사회에 대한 그의 도전은 계속된다.

●유쾌한 페미니즘을 향하여

4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 동안 박 대표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하하하’ 웃음을 그치지 않는다. 대다수의 사람이 페미니스트에 대해 갖는 거리감 또는 거부감을 허물기 위한 ‘작전’이다.

“페미니스트는 규범적 여성상에서 벗어난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혀 있죠. 많은 여성이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것도 낙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는 페미니즘에 재미를 덧입히는 데 주력한다. 기존 여성단체들이 성차별, 가정폭력 추방을 위한 법 개정에 주력한다면 그는 여성주의 오락과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많다. ‘나는 제사가 싫다’ ‘미스코리아 대회를 폭파하라’ ‘사위에게 주는 요리책’ 등 그동안 ‘이프’의 단행본 제목에는 박 대표가 추구하는 유쾌한 페미니즘의 분위기가 그대로 묻어 있다.

“페미니즘이 별건가요. 그냥 ‘자신에게 말을 거는 작업’으로 보면 돼요. 여성이기에 느끼는 기쁨 슬픔 분노의 감정을 깨달아 나가는 과정이죠. 페미니스트가 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피켓을 들고 여권을 외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즐기는 것도 페미니즘이죠. 그래서 ‘이프’의 창간 모토도 ‘웃자! 뒤집자! 놀자!’로 정했죠.”

페미니즘 대중화에 열을 올리다 보니 진보와 보수 양쪽으로부터 비난이 들려왔다.

4년 전 ‘오르가슴을 찾아’ 기획은 ‘이프’ 서버가 마비될 만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감춰져온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해 크게 말한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는 최근 ‘그래, 나 월경한다!’ 기획을 통해 생리대 부가세 면세 논쟁에 불을 지폈다.

여성단체들의 주장은 일회용 생리대가 비싸든 싸든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적인 필수품이라는 것. 따라서 생필품에 적용되는 부가세 면세 품목에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그러면 남성의 필수품인 면도기도 면세 대상’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세법상 부가세 면세 품목에서 공산품은 모두 제외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부가세 면제야말로 사회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생리’의 가치를 인정하는 첫걸음”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남성이 생리를 한다면 어땠을까요. 신성하고 긍정적인 의미를 갖지 않았을까요. 생리통 연구소까지 생겨났을지도 모르죠. ‘생리는 창피하고 내밀한 경험’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변하지 않는 한 생리대 부가세 면세 주장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죠.”

보수 쪽의 비판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진보 쪽의 시선도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창간호부터 ‘지식인 남성의 성희롱’이라는 주제를 들고 나오자 “지식인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려는 것이냐”는 비난이 여성계 내부에서조차 들려왔다. 그러나 여성의 인권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봤다는 의견도 이끌어냈다. 그 뒤 ‘운동사회 내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는 2000년 진보진영 내 성폭력 실태와 가해자 실명을 공개하기도 했다.

“여성운동과 진보운동이 언제나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죠. 어떤 사회운동이건 다양한 시각이 있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요. 여성과 남성간, 그리고 여성과 여성간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보고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 결국 여성운동이잖아요.”

●‘미스 박’에서 ‘박 대표’로

이 달변의 여성운동가에게도 ‘미스 박’으로 불리던 시절은 있었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박 대표는 이화여대 졸업 후 72년 신문사에 입사하면서 남성 중심의 사회를 처음으로 혹독하게 경험했다.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남자 기자들은 ‘박 기자’ ‘박 ○○씨’로 부르는데 자신은 언제나 ‘미스 박’으로 불렸던 점. 부장과 선배 기자들이 무심코 던지는 “내 책상 좀 닦아줘” “은행 심부름 해주고 퇴근할래” 같은 말들은 그의 가슴에 비수가 돼서 꽂혔다. 그때마다 그는 “저는 제 책상도 안 닦는데요” “퇴근 안 해도 되니 심부름 안 할게요”라고 맞받아쳤다.

당연히 그에 대한 상사와 동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당돌한 태도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도 있었다. 바로 입사동기였던 이경형 현 대한매일 논설실장(56). 박 대표와 3년 사내 연애 끝에 결혼한 이씨는 지금도 부인을 자랑스러워한다.

사진기자 생활은 7년 만에 접었다. 심한 입덧에 임신 8개월까지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들고 몸싸움을 하다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자녀 셋을 낳고 워싱턴특파원으로 발령난 남편을 따라 미국에서 잠시 살다가 90년대 중반 귀국한 박 대표는 그동안 하고싶었던 여성언론운동에 본격 뛰어들었다.

‘페미니스트’와 ‘엄마’라는 두 역할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느냐고 묻자 박 대표는 “역시 대화 뿐”이라고 답한다.

“어렸을 때 어두운 빈집에 혼자 문을 따고 들어가는 외로움을 알아서 그런지 자식들에게는 절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니 애들하고 많은 얘기를 통해 엄마의 상황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 모범 답안 속에서도 박 대표의 페미니스트적 기질은 숨길 수 없다. 자녀들과의 대화 주제로 ‘응급 피임약’이 등장하고 남편 보다 아내의 술친구들이 더 많이 찾아오는 곳이 바로 그의 가정이다.

이제 그는 독자층 확대를 목표로 잡고 있다. 기존 독자의 80% 이상이 여성이고 이 중 상당수가 30대 전문직 종사자이기 때문에 이들의 성, 육아, 출산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다뤄왔다. 그러나 미혼모, 빈민층 여성, 여성 및 노인문제에도 관심을 가질 계획이다.

그는 요즘 친정 어머니의 말을 자주 떠올린다.

올해 91세인 그의 어머니는 혼자 힘으로 2남3녀를 키워내면서 힘들 때마다 “너희만 아니었으면 나는 다른 삶을 살았을 텐데…”라고 중얼거리셨다. 어렸을 때 그는 이 말이 너무 듣기 싫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한다. 영어단어 ‘이프’가 뜻하는 그대로 여성은 지금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페미니즘 언론 핫이슈▼

우리나라에 페미니즘 매체는 많지 않다. 주간지 ‘여성신문’ ‘우먼타임스’가 있고 월간 또는 계간 잡지로는 ‘이프’가 유일하다. 지난 1∼2년 동안 설립이 비교적 쉽다는 이점 때문에 여성주의 웹진들이 10여종 생겨났다. ‘달나라딸세포(dalara.jinbo.net)’ ‘언니네(unninet.co.kr)’ ‘아줌마(zooma.co.kr)’ ‘살류쥬(salluju.pe.kr)’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 페미니즘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주요 논쟁들을 소개한다.

▽‘대통령 박근혜를 밀까 말까’〓올봄 불거져 나온 이 논쟁은 장상 총리서리가 낙마하면서 가열되고 있다. 여성의 정치 세력화에 대한 이 논의는 ‘여성은 여성 정치인을 지지해야만 나중에 정치적 파워를 행사할 수 있다’는 측과 ‘도덕적 논란 소지가 있는 정치인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지해서는 안된다’는 측이 대립하고 있다.

▽‘생리대는 생필품일까’〓여성단체들이 생리대는 여성에게 생필품이므로 부가가치세를 없애줄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해 재정경제부가 불가 입장을 보인 후 네티즌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재경부의 주장은 ‘부가세 면세 대상은 농·축·수산물이나 의료 서비스 등에 한정되기 때문에 공산품인 생리대는 제외된다’는 것. 재경부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생리대 가격인하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여성단체들은 부가세법 개정을 위한 입법 청원을 추진하고 있다.

▽‘간통죄를 없애야 하나, 말아야 하나’〓폐지를 주장하는 쪽은 개인의 행복추구권이나 인권은 그 무엇으로도 침해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또한 최근 여성이 간통의 주체로 등장하는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에 과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간통죄 조항은 전근대적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아직 여성은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간통죄 폐지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박옥희 대표는…▼

▽50년 전북 전주 출생

▽69년 서울 창덕여고 졸업

▽73년 이화여대 신방과 졸업

▽72∼79년 서울신문(현 대한매일) 사진기자

▽89∼91년 여성신문 편집위원

▽97년 ㈜도서출판 이프 이사

▽99년∼ ‘이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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