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그래도 답은 '제3의 길'이다"

  • 입력 2002년 10월 4일 17시 44분


◇제3의 길과 그 비판자들/앤서니 기든스 지음 박찬욱 외 옮김/285쪽 1만2000원 생각의나무

지난 몇 년간 서구사회의 정치변동을 판독하는 키워드의 하나는 ‘제3의 길’이다. ‘제3의 길’은 영국의 수상 토니 블레어가 주창하고 독일의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응답해 위기에 처한 사회민주주의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중도좌파의 정치적 기획이다.

‘제3의 길’은 물론 새로운 패러다임이 아니다. 지난 20세기 내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를 동시에 극복하려는 다양한 ‘제3의 길’ 모델들이 존재해 왔다. ‘제3의 길’이 새삼스레 주목받은 이유는 지난 1997년 영국 노동당 당수 블레어가 신(新)사회민주주의 기획으로 ‘제3의 길’을 내걸어 총선에서 승리했다는 데 있다. 이후 ‘제3의 길’은 서유럽과 미국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최근 우파의 공세가 강화돼 열기가 적지 않게 식었지만, 몇 주전 독일 총선에서 슈뢰더가 재집권에 성공해 ‘제3의 길’이 여전히 살아 있음이 입증된 바 있다.

이 최신판 ‘제3의 길’의 이론적 원조는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사회이론가 중의 한 사람인 기든스는 좌파와 우파를 넘어설 수 있는 사회민주주의의 갱신 전략으로 ‘제3의 길’을 제창함으로써 블레어와 노동당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든스가 제시한 이 최신 버전의 특징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아니라 대처리즘의 신자유주의와 복지국가의 구(舊)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동시에 넘어서는 이른바 ‘급진적 중도’를 표방한다는 데 있다.

이번에 우리말로 옮겨진 기든스의 저서 ‘제3의 길과 그 비판자들’은 ‘제3의 길’에 대한 비판들을 포괄적으로 검토하고 이 기획을 다시 한번 옹호한 책이다. 그 동안 ‘제3의 길’에 대한 비판은 우파와 좌파로부터 모두 제기돼 왔다. 우파로부터의 비판이 ‘제3의 길’이 복지국가의 환상을 고수한다는 데 맞춰져 있었다면, 좌파로부터의 비판은 ‘가면을 쓴 신자유주의’에 불과하다는 데 집중되었다. 특히 정통 좌파들에게 블레어는 ‘가방을 들지 않는 대처’와 유사하다고 비난되기도 했다.

이런 비판들에 대해 기든스는 크게 정부 및 국가 개혁, 불평등의 해소, 세계화에의 대응이라는 시각에서 ‘제3의 길’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마디로 ‘제3의 길’은 ‘책임 없이 권리는 없다’는 명제에 기초해 새로운 사회계약의 구축을 제안하며 평등주의적 원칙에 입각해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를 모색하는 동시에, 세계화의 변동을 진지하게 수용하려는 정치적 기획이라는 것이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볼 때 이런 ‘제3의 길’의 규범적 지향을 반대할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서유럽 신사민주의의 다양한 버전들, 예컨대 영국의 ‘시장지향적’ 접근, 네덜란드의 ‘시장과 합의 지향’ 모델, 스웨덴의 ‘개혁된 복지국가’ 모델, 프랑스의 ‘국가주도 노선’ 등은 크게 보아 기든스의 ‘제3의 길’과 별반 차이가 없다. 시장의 활력을 적극 수용하는 경제개혁, 민주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높이는 정부개혁, 그리고 국가와 시장의 동반자적 관계로 시민사회를 활성화하려는 ‘제3의 길’의 구체적인 전략들에 대해 이의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이런 목표를 제시했음에도 과연 ‘제3의 길’이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연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잡아 왔으며, 또 앞으로 잡을 수 있느냐에 있다. 사실판단의 관점에서 ‘제3의 길’의 공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영국과 독일에서는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던 반면에 나머지 국가들에서는 실패한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최근 서유럽 여러 국가들에서 중도좌파 정권들이 실각하고 우파 정권들이 재등장한 것은 ‘제3의 길’의 한계를 드러내는 징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제3의 길’은 어떠한가. 주지하듯이 현정부 집권 초반기에 국정철학으로 제시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론’은 ‘제3의 길’의 한국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집권 후반기에는 신사회민주주의적인 성격이 많이 탈색되었지만, 국가·시장·시민사회의 균형적 발전에서 생산적 복지정책에 이르기까지 ‘제3의 길’은 현정부의 정책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왔다.

이 ‘제3의 길’의 한국적 수용에 대해서는 우리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의당 신중할 필요가 있다. 무릇 서구사회의 이론과 전략은 우리에게 ‘참고서’이지 ‘교과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우리사회의 보편성을 고려할 때 ‘제3의 길’의 한국적 적용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우리사회 역시 세계사적 변동인 세계화와 지식경제의 도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이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의 하나로 ‘제3의 길’은 유효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장의 활력과 사회적 정의는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기각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이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사람들에게 제3의 길은 여전히 매혹적인 정치적 기획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kimhoki@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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