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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9월 3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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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TV를 통해 수해지역을 볼 때마다 물에 잠긴 자동차나 못 쓰게 된 냉장고보다도, 쓰레기가 된 가족사진 앨범을 보면서 속상해 하는 신부나 할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아팠다. 다시 장만할 수 있는 다른 생활용구에 비해 첫아이의 돌사진과 딸의 졸업식에서 함께 찍은 기념사진 따위를 영원히 잃어버린 여인의 슬픔에 우선 동감했다. 그러면서도 늘 남의 일로만 여기고 지냈다.
▼수마가 삼킨 내고향 강릉▼
이번 수해에는 가족사진만이 아니라 집이 통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수재민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한 분들을 생각하면 이러한 연민은 소박한 감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자동차나 냉장고는 고사하고 계곡의 급류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가옥이 수십 채에 이르러, ‘복구’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라고 한다.
무너진 도로나 물에 잠긴 전답보다도 나는 유실된 묘지 곁에서 오열하는 늙은 아들의 주름진 이마를 볼 때 더욱 가슴이 아팠다. 멀리 쓸려 내려간 조상의 유골을 찾기 위해 맨손으로 진창을 파헤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천재(天災)’니 ‘인재(人災)’니 ‘허탈’이니 ‘망연자실’이니 하는 말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재난이었다. 그러면서도 늘 내겐 닥쳐오지 않을 일로만 여겼다.
도로와 전답의 유실은 고사하고 이번 수재에는 수백 기의 묘지가 유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200명이 훨씬 넘는 사망 실종자가 생겼다. 이는 재난이라기보다는 참상이라 할 수밖에 없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나 유족들을 생각하면 유실된 묘지에 대한 안타까움은 정도가 덜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 기상관측 사상 최고의 강우량을 기록하며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루사’가 전국에 수마(水魔)의 상흔을 남겼다. 이번 태풍은 경남 합천, 경북 김천, 충북 영동 지역 등을 강타하면서, 그 중에서도 특히 강원 강릉 동해 삼척 지역에 극심한 피해를 남겼다. 그 곳에 고향집을 둔 나로서는 이건 정말 남의 일이 아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던 날 고향으로 전화를 한 이유는 걱정과 우려가 섞인 안부인사였다. 태백산맥에 기댄 해안 지역이므로 산사태와 해일에 대한 염려는 있었지만, 하루 880㎜에 이르는 폭우가 쏟아져 시가지가 흙탕물에 잠기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다음날 아침 TV를 통해 바라본 고향의 모습은 그 자체가 공포를 불러왔다. 가옥이 떠내려가고 전답이 자갈밭으로 변한 장면을 보는 기분은 경악과 허탈이 교차하는 얄궂은 심정이었다. 이전 다른 지방의 수해 장면을 보던 때와는 느낌의 강도가 달랐다.
고향에서 전화를 받은 동생은 다행히 우리 집은 피해를 보지 않았으나 수해의 실상은 언론에 알려진 것 이상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이틀 동안 퍼부으며 내린 비가 싹 쓸어버려 하천과 계곡의 지형지물은 형태마저 바뀌었다는 설명이었다. TV로 보는 장면은 그나마 사람들의 접근이 가능한 지역이었고, 물바다가 된 동해시 삼화동과 같은 지역은 관심 밖에 소외돼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그런 다음 세 번째로 다시 전화를 했다. 선영(先塋)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산사태가 날 리도 없고 물길에 면해 있지도 않지만, 올해 봄 장례를 치른 선친의 묘소가 걱정스러웠다. 동생은 도로가 끊어졌기에 걸어서 선영에 다녀왔다고 보고를 했다. 봉분 뒤편 경사면에 흙이 파이기는 했으나 묘지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작업복 입고 달려간 까닭▼
그런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재경 강릉시민회’의 전화였다. 서울에 살고 있는 출향인들은 고향을 돕기 위해 ‘9월 4일 오전 10시30분, 강릉시청 청사 앞’으로 집결하라는 통지였다. 이제 나는 가족사진 앨범과 집을 다 잃어버리고, 가족의 생명과 조상의 유골마저 망실한 고향사람들을 위해 고향에 가게 되었다. 피서와 제사를 위해 넘던 대관령을 수해복구를 위해 작업복을 입고 넘게 된 것이다.
수해를 당한 고향분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양수기와 마실 물과 일용할 음식이겠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이웃의 관심과 애정도 필수조건임에 틀림없다. 평소 고향을 안식의 공간으로만 여겨왔던 사람들이 작업복을 입고 고향으로 달려가는 까닭이 그와 같다.
심상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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