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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8월 30일 17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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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선 미래의 대안이나 전망이 있단 말인가?
‘계몽의 변증법’은 아우슈비츠나 미국적 문화산업으로 상징되는 20세기의 야만상태를 규명하기 위해, 인류가 자연상태에서 빠져나와 고도 산업사회에 이르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이성’이나 ‘계몽’과 같은 범주를 중심으로 해석한 20세기의 고전이다. 하버마스처럼 ‘계몽의 변증법’을 편법적으로 극복하지도, 포스트구조주의자들처럼 ‘현실’ ‘역사’ ‘주체’ 등의 범주와 함께 ‘계몽의 변증법’ 자체를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계몽의 변증법’이 한 단계 더 진행되어 ‘자연’의 말살과 ‘총체적 체계’의 실현이 가속화되는 ‘세계화’의 시대에 ‘계몽의 변증법’을 진정으로 극복할 이론적 대안이나 그를 위한 현실적 싹이 존재한단 말인가?
저자의 자유베를린 대학 박사논문 ‘음악과 계몽 비판; 아도르노의 쇤베르크 해석과 계몽의 변증법’을 한국어로 다듬어 출판한 이 책은 우선 원 제목에서 보듯 아도르노의 철학 내지 사회 사상을 그의 음악 이론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서 해석한다. 기존의 아도르노 연구는 대체로 아도르노 사상의 ‘다의적 전체’를 충실히 재현하여 현실 해석에 응용해나가거나 아니면 정정당당한 ‘내재적 비판’을 행하기보다는 -아도르노 자신이 우려한 대로- 그의 사상을 물화시키거나 자신의 입맛에 맞게 윤색하는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사회학자이면서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은 저자의 연구서는 ‘음악적 사유’와 ‘음악에 대한 사유’가 분리되지 않는 아도르노 철학의 원칙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독일에서도 상당한 인정을 받을 연구서라고 여겨진다.
이 책은 아도르노의 철학과 음악 이론을 연결시킨 연구서일 뿐 아니라 아도르노 사상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훌륭한 개론서 역할을 한다. 아도르노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좋은 한가지 방법은 미래로의 출구가 없던 노쇠한 제국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정신적 분위기를 떠올리면서 아도르노의 사유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추적하는 것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아도르노와 쇤베르크’를 부제로 삼아 ‘심미적인 것’, ‘음악적인 것’(미메시스, 비동일적인 것, 자연, 자연미 등의 관념과 동일선상에 있는)을 중심축으로 아도르노 철학으로부터 음악이론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책의 흐름은 아도르노를 아도르노답게 독자에 소개시켜주는데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라는 제목 달기는 너무 거창하게 느껴진다. 이유는 ‘계몽의 변증법’을 극복하는 ‘이론’이 현 단계의 역사 수준에서 가능할까라는 의구심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서’라는 제목의 근거가 되는 에필로그의 엥포르멜 음악 이야기는 풍성한 상상력을 자극하며 생산적인 논의거리를 제공하리라 여겨진다. 50년대 신음악 운동에 대한 아도르노의 긍정적 평가에서 저자는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설 대안을 모색한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자연 지배와 억압의 가속화에 불과할) ‘뒤로 돌아갈 수도’(단지 퇴행에 불과한)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모순의 화해를 추구하는 대신 모순이나 이율배반을 그저 감당하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물을 만드는’ 행위는 유토피아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거부하는 ‘우상금지’의 관념과 매개되어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다.
‘체계’나 ‘보편성’을 거부하고 개별성과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 우연성에 기반을 둔 열린 사유, 그때그때의 문제해결은 엥포르멜 음악을 대하는 아도르노에게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싹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이 싹은 (어쩌면 권위적으로도 보일) 숨막힐 정도로 꽉 짜인 아도르노의 사유체계(또한 총체화된 현실의 체계) 속에 있는 작은 ‘자유’의 숨구멍에 불과할 것이다. 이 숨구멍을 너무 과장할 경우 현실이라는 지반을 잃어버린 포스트모더니즘이이라는 ‘끈 떨어진 연’이 될지 모른다. 역사나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겹지만 그것을 벗어던진, 너무나 가벼운 현대인은 또다른 슬픔을 안겨준다. 물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생활을 하다 진실을 알고는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어 방황한 외디푸스가 말년에 되찾은 ‘명랑성’은 어쨌든 필요할 것이다.
‘Das Ganze ist Unwahre(전체는 비진리다)’를 간판으로 내건 저자의 홈페이지에서는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려는’ 자유의 실천이 엿보인다. 저자로부터 책을 받고 그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린 글은 이렇다.
“책의 제목을 음미하면서, 노명우씨께는 ‘넘어서’라는 표현이 합당하리라는 느낌이 듭니다. 계몽의 변증법의 무게에 짓눌리지도, 그렇다고 세상 바깥으로, 현실이란 삶의 기반으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도망가지도 않고…, 그런 기묘한 조화가 홈페이지에서 풍겨나오네요.”
김유동 경상대 교수·독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