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히틀러 손아귀에 와인만은 안된다 ´와인전쟁´

  • 입력 2002년 8월 9일 17시 30분


◇와인전쟁/돈 클래드스트럽 지음 이충호 옮김/373쪽 1만2000원 한길사

나지막이 굽이치는 구릉 위로 새벽 별빛이 사위어간다. 지평선의 어슴푸레한 햇살이 한 날의 시작을 알린다.

이슬에 촉촉이 몸을 적신 포도넝쿨들도 하루의 일광을 달콤한 자양으로 익혀낼 준비를 한다. 자기의 살과 피가 언젠가 ‘생명의 물’(Eau de vie·와인을 뜻하는 은유)로 축복받을 것임을 알고 있기에.

어느 날 캐터필러의 굉음이 구릉을 파헤치고 지나간 뒤, 언덕의 평화는 산산이 깨어진다. ‘프랑스의 가장 값진 보석’으로 불려온 ‘생명의 물’ 전부가 히틀러의 군화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이 책은 ‘와인’이라는 일상의 소품을 렌즈 삼아 프랑스 민중의 대 독일 저항을 들여다 본 ‘전쟁의 미시사(微視史)’이자, 수많은 증언으로 수집한 전쟁의 단면을 거대한 모자이크화로 구성한 역사 다큐멘터리다. 해마다 8월이면 파시즘의 침탈과 희생을 곱씹어보는 우리에게도 이 책이 열어주는 역사의 교훈은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와인을 숨겨라!▼

1939년 9월. 히틀러의 기갑사단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프랑스 정부는 포도밭 농부들에게 무슨 명령을 내렸을까? 소집영장? 아니다. 오히려 군인들이 일손을 돕기 위해 포도밭으로 파견됐다. 탱크로 쑥대밭이 되기 전에 수확을 마쳐야 한다는 정부의 판단이었다.

이듬해 늦봄이 되면서 독일군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파리 최고의 레스토랑 ‘라투르다르장’에도 비상이 걸렸다. 10만병의 고급 와인을 모아둔 와인 저장고를 지켜야 했기 때문.

주인의 아들인 클로드가 군대에서 여섯 시간의 외출을 허가받았다. 2만병의 특급 와인을 한 쪽에 모으고, 벽돌을 쌓기 시작했다. 파리 점령 이후 독일군은 이 창고에서 8만병을 쓸어갔지만 유명한 1867년산 와인은 한 병도 찾아낼 수 없었다.

수많은 이름없는 농민들도 ‘와인 보호전’에서 승리했다. 지하창고, 맨땅, 벽장…. 아이들은 들판에서 거미를 잡아와 새로 쌓은 벽 앞에 거미줄을 치게 했다.

▼와인 총통▼

프랑스에 진주한 독일군은 독일 지도층에 공급하거나 제3국으로 수출해 전쟁비용을 보태기 위해 대대적인 와인 수매에 나섰다. 군인들이 와인의 품질을 감별할 수 없는 일. 예부터 프랑스 양조업자들과 거래해온 독일 상인들이 수탈의 대리인 역할을 맡았다. 이들에게는 ‘와인 총통’(Weinf¨uhrer)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퓌러’가 ‘지도자’와 ‘가이드’라는 이중의 뜻을 갖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보르도의 ‘총통’ 뵈메르스, 부르고뉴의 제그니츠, 샹파뉴의 클레비시 등은 다른 총통들과는 어딘가 좀 달랐다. “우리는 전쟁 전부터 프랑스 와인업자들과 친구였다. 전쟁이 어떻게 끝나더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그들은 모국 관리를 기만하면서까지 와인에 좋은 값을 쳐주었다. 질 낮은 와인을 상등품으로 둔갑시키는 데 협조하기도 했고, 포도 산업의 중요성을 지역사령관에 역설해 농민들의 제3국 징용을 면케 해주기도 했다. ‘쉰들러’의 역할을 떠맡았던 것이다.

▼레지스탕스, 해방▼

전황이 독일에 불리해지면서 이상 징후들이 속속 발견됐다. 독일에 도착한 와인이 모두 물로 변해있거나, 아예 약탈당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와인을 지키기 위한 레지스탕스의 활동이 시작된 것. 지하의 비밀 와인창고는 회합, 무기보관, 도주를 위해 유용하게 쓰여졌다.

북아프리카 전에 앞서 독일군이 ‘열대 지역에 보낼 수 있도록 포도주를 포장하라’고 업자들에 지시를 내렸을 때도 그 소중한 정보는 재빨리 런던으로 전달됐다.

노르망디 상륙에 이어 프랑스군과 미군이 남프랑스에 상륙하자 작전은 ‘샴페인 전쟁’이라고 명명됐다. 프랑스군은 거점 확보 외에 포도 명산지를 훼손하지 않는데도 전력을 기울였다. 독일로 진격해 들어간 프랑스군은 미군 지휘관의 명령을 어기고 히틀러의 별장이 있는 베르히테스가덴을 선점했다. 소문 그대로, 1929년산 ‘라투르’ 등 전설적인 명품 와인이 해발 2400미터의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에필로그▼

전쟁은 수많은 개인들의 일상을 생각지도 못했던 심연으로 몰아넣는다. 알사스의 와인 농가에서 자라나 하루아침에 독일군으로 징병된 뒤 러시아 전선의 잔학상을 목도하는 조르주 위겔. 전쟁 초반 독일군의 포로가 된 뒤 수용소에서 ‘와인 파티’를 기획하는 가스통 위에. 그들의 일화는 수천 ㎞ 떨어진 고향에서 전쟁을 이겨나가야 하는 가족들의 사연과 나란히 교차된다.

평화가 찾아온 뒤 무통지방의 와인업자 로트실트 남작은 낯익은 필적의 편지를 받는다. ‘저는 늘 귀하의 포도주를 사랑해 왔습니다. 독일에서 귀하의 와인을 판매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말미에는 보르도의 ‘와인 총통’ 이었던 뵈메르스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로트실트는 즉각 답장을 쓰기 시작한다.

“왜 안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새로운 유럽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저자는 에미상을 세 차례나 수상한 미국 TV기자 출신의 작가. ‘와인 스펙테이터’ 지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와인 전문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지난해 미국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올해 최고의 책’ (Best of 2001)에 선정됐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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