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군림하는 자 땅을 치리라 ´성공한 왕 실패한 왕´

  • 입력 2002년 8월 2일 17시 23분


◇´성공한 왕 실패한 왕´/신봉승 지음/360쪽 9000원 동방미디어

《나라를 통치하는 일에도 ‘수직적 위엄’이 아닌 ‘수평적 경영 마인드’가 필요한 시대가 됐다.

사극작가 신봉승씨는 조선 왕조 27명의 왕들을 CEO 마인드 측면에서 접근해 ‘성공한 왕’ ‘실패한 왕’을 각기 5명씩 꼽았다. 왜란과 호란 두 번에 걸친 대 외환(外患)과 왕조 내부 갈등이라는 내우(內憂) 등 수없이 많았던 위기 속에서도 찬란한 문화 유산을 남긴 ‘거대 기업’ 조선. 누가 이 기업을 올바르게 이끌었고 누가 위기로 몰아 넣었는가를 살펴 보는 일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성공한 왕들의 공통점은 국운이 성하고 쇠하는 근본 이치를 깨우치고 있었으며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기 보다 신료와 백성들을 신임하며 국제 정치에서도 국익을 우선해 발빠른 행보를 보였다. 실패한 왕들은 절대 권력을 사적인 것으로 전락시키면서 정치를 자신의 권력연장 도구로 사용했다. 등장인물만 바꾸면 오늘날 우리 모습이 그대로 겹쳐진다.

작가가 꼽은 10명의 지도자들의 공과를 요약해 본다.》

▼성공한 왕▼

1.태종-치밀한 국가경영술

그에게는 나라의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이 있었다. 자신이 물러난 뒤부터는 태평성대를 열어가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졌던 그는 ‘외척이 성하면 나라가 망한다’며 네 처남에게 사약을 내렸다. 자신을 왕위에 밀어 올리기까지 결정적 도움을 주었던 왕비(원경왕후)의 결사적인 저항을 물리친 결단이었다. 또 막역한 친구이자 혁명동지인 이숙번까지도 유배를 보냈다.

역대 대통령들이 처족으로 인해 얼마나 곤혹을 치렀으며 지금도 치르고 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가신’(家臣)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방치해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는 현장도 지켜보았다. 그래서 태종의 결단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태종은 후대를 위해 52세 젊은 나이에 과감하게 물러났다.

2.세종-수평적 경영 마인드가 이뤄 낸 위대한 성취

그는 표내지 않으면서도 준엄한 카리스마, 온화하면서도 강한 지도력으로 조정을 이끌었다. 새 정책을 실행할 때는 여론을 살펴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고 집현전과 같은 기구를 운영하면서 신료들에게 자율과 책임을 실어 주었다. 아버지, 어머니, 큰 아들, 아내의 죽음으로 재위기간 3분의 1을 상주(喪主)로 보내는 불운을 겪으면서도 신하들과 토론하는 경연에 불참하는 일 없이 정사에 충실했다. 신뢰할 수 있는 스태프를 정하면 권한을 대폭 위임했다. 세공(세금)을 책정하기 위해 암행어사를 파견해 가가호호 세제방법을 물었고 찬성보다 반대가 많자, 세공 책정을 연기했다.

3.성종-견제와 균형의 지배원리를 실행한 지략가

조선왕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기반과 체제를 완성시킨 군주였다. 경사(經史)에 밝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학자들과 자주 토론 했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그 결과 ‘경국대전’을 완성했고, ‘동국여지승람’ ‘삼국사절요’ ‘동문선’ 등을 펴내는 등 문예의 기운을 북돋았다. 세조때 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는 김종직 일파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세력을 대거 등용했다. 덕분에 신료간 세력균형을 이룩하고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성종의 문치(文治)주의는 공명하고 정대하며 도덕적인 용기를 가진 선비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통치자가 공론을 소중히 한다는 것, 사심을 버릴 줄 안다는 것, 양식있는 막료를 발탁해 전폭적인 신임을 보낸다는 것이 성공 CEO의 요건임을 보여준 왕이었다.

4.선조-이상국가 실현을 꾀한 인재의 발탁

선조는 국난(임진왜란)을 극복했다는 점 보다는 전쟁을 자초한 부정적인 평가쪽에 무게가 실렸던 임금이었다. 그러나 후대에 들어서 공이 많은 임금으로 재평가되면서 ‘선종실록’이 ‘선조수정실록’으로 바뀌었다. 종(宗)은 덕(德)의 상징이며 조(祖)는 공(功)의 상징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초반에 외척들의 전횡으로 일어났던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의 상흔을 씻어내고 당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황과 이이 등을 극진하게 예우해 침체된 정국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당시 과거제도가 문장능력을 평가하는 데만 치우치자, 학행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기 위해 각 고을을 순행하기도 했다. 정여립의 난, 국론 분열 등 나라에 화(禍)도 많았지만 역사상 인재가 가장 많이 배출됐던 때가 선조 때였다.

5.정조-공명정대하고 솔선수범의 리더십

조선 왕조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현군 정조는 세종에 비견되는 임금이다. 그의 리더십은 ‘공명정대함’으로 상징된다. 정사를 바르게 하고자 선왕 영조가 배척했던 사람들까지 불러들여 인재로 발탁하는 등 뿌리깊은 정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또 모든 점에서 솔선수범을 보였던 그는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임을 자처하면서 조선을 독자적인 문화국가로 끌어올렸다. 오직 실력으로만 사람을 평가함으로써 유능한 스태프들을 거느렸다.

개국이래의 금기를 깨고 서얼을 등용해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날로 번창하는 서학(천주교)에 맞서, 정학(正學)을 돈독히 하고 주자학이 깊이 뿌리 내리게 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심성을 다스리고자 했다.

▼실패한 왕▼

1.세조-뒤틀린 야망, 탐욕으로 얼룩진 국정의 난맥

왕위를 찬탈한 그는 가신들과 함께 국정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다. 자신에게 불손한 신하는 가차없이 처단하고 순종하는 신하에게는 너그러웠다. 정치는 상명하달식으로 이뤄져 정국의 경색을 초래했다. 이에 따라 특권이 횡행하고 비리가 난무하는 국정의 난맥상이 노출됐다.

2.중종-우유부단한 지도력

쿠데타의 주체들이 옹립한 ‘허수아비 임금’이라는 탈을 벗고 나름대로 선정을 펴고 싶었던 중종. 이상정치를 구현하려 했던 조광조의 개혁 의지에 자연스럽게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기득권 세력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중종을 협박했으며 그들의 반발은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그에게 위기로 다가왔다. 중종은 그토록 신뢰하며 따랐던 조광조를 제거하는 것으로 기득권 세력의 손을 들어준다. 정보 부족과 지도력 부재에 따른 판단착오,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그의 이상정치는 좌절됐고 한 왕조가 실패의 늪으로 가라앉았다.

3.광해군-패덕의 이름을 남긴 연약한 군왕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 연산군과 함께 쿠데타 세력들에게 밀려나는 오명을 남긴 왕이다. 총명함을 타고났지만 온갖 콤플렉스의 벽을 뛰어 넘지 못해 모후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부왕의 적자를 죽였다. 그의 폐덕은 네 명의 형제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능수능란한 실리외교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 장막으로 인해 판단이 흐트러졌다. 인재 기용에도 파당성이 두드러져 반대파의 질시와 보복심을 자극했다.

4.인조-적장앞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린 왕

쿠데타를 통해 왕에 옹립된 그는 지독한 정쟁에 시달렸기 때문인지 편협하고 의심이 많았다. 절대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를 경우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쿠데타에 성공한 실세들은 서로를 견제하면서 패거리를 짰다. 인조는 공신들을 제압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반란이 일어나고 치욕의 몽진 길에 오른다. 명청 교체기, 후금세력이 강해져 조선을 위협하는 국제정세에도 불구하고 주변국에 대한 정보 부재로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인 병자호란을 초래한다.

5.고종-망국의 한을 짊어진 불행한 황제

고종의 불행은 앞서 흥선대원군부터 비롯된다. 대원군의 독단과 전횡, 장기집권에 대한 집념에서 비롯되는 노탐(老貪)은 왕조를 파탄으로 몰아가는 씨앗이 된다. 그의 퇴진이후 고종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무력하고 우유부단했던 고종은 외세의 각축을 이겨 낼 스태프도 없었으며 결국 일본국의 폭력으로 아내를 잃고 자신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며 급기야 아들과 함께 망국의 한을 짊어지게 된다. 급변하는 주변 정세를 파악하지 못했고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을 구축하지 못함으로써 망국을 자초한 사례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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