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월드컵] '성과와 과제' 좌담

  • 입력 2002년 6월 27일 18시 40분


이언오 상무 / 최영미 시인 / 조대엽 교수
이언오 상무 / 최영미 시인 / 조대엽 교수
《‘한국의 가능성’을 확인한 2002 한일월드컵은 서서히 잔치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 축구팀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4강 진출’이라는 신화를 이룩했고, 해외동포를 합쳐 7000만명의 한민족이 한국인의 위대한 저력과 하나됨을 확인했다. 한국의 대외 이미지는 ‘은둔의 나라(Hermit Kingdom)에서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로 업그레이드됐다. 온 국민과 함께 월드컵 감동을 만끽했던 삼성경제연구소 이언오 상무(48), 고려대 조대엽 교수(42·사회학), 시인 최영미씨(41)가 26일 온 국민의 함성이 메아리쳤던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에 모여 이번 월드컵의 성과와 한국 선수들의 투혼, ‘히딩크 리더십’의 의미와 과제, 축구를 통한 사회통합과 세대간 신뢰 구축 등을 키워드로 격의 없는 대담을 나눴다. 사회는 동아일보 문화부 학술담당 김형찬 기자(철학박사)가 맡았다.》

월드컵 4강 진출은 물론 온 국민의 자발적 거리 응원과 국가 이미지 제고 등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습니다. 먼저 우리가 월드컵을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조대엽〓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자긍심을 얻은 게 무엇보다도 큰 수확입니다. 지금까지 ‘국가’란 이미지가 전쟁, 억압, 통제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됐었지요. 그런데 이번 기회를 통해 젊은이들이 태극기를 패션화하고 ‘대∼한민국’을 집단적으로 외치면서 20세기적 국가주의가 문화주의로 변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발적인 국가적 일체화가 이뤄지고 있는 셈입니다. 10, 20대와 여성 등 내면의 표현 욕구를 행동으로 분출하지 못했던 세대들이 광장으로 뛰쳐나와 집단적으로 하나됨을 체험한 것은 앞으로 이 세대들에게 오래도록 문화적 자산이 될 겁니다.

▽이언오〓거스 히딩크 감독의 지휘 아래 한국 선수들이 외국의 강팀과 대등하게 대결해 세계의 벽을 무너뜨리면서 국민도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0∼1970년대의 ‘하면 된다’ 정신을 다시금 찾았다고나 할까요. 외환위기, 지도층의 부패 문제 등으로 5월까지만 해도 한국은 침체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월드컵 한 달 동안 우리 국민으로부터 하나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또 그동안 국민 참여행사가 정부 주도로 위에서부터 만들어진 게 대부분이었지만 이번은 아래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됐다는 점이 고무적이라 할 수 있겠지요.

▽최영미〓월드컵을 계기로 지역감정도 완화될 겁니다. 사람들은 한국 축구 선수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출신은 신경 안 쓰거든요. 히딩크 감독이 철저히 실력만으로 선수들을 선발하고 기용한 것을 봐도 학연 지연이 비효율적인 것임을 확인한 것이죠. 또 제대로 노는 문화가 우리 내면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개인적으로 김남일 선수의 열성팬이 됐어요. 한국의 놀이 문화는 일제강점기 이후 고단한 근대사를 겪으며 사라졌고, 광복 이후에는 살벌한 경쟁풍토 속에서 술 담배 여자 등이 곁들여진 ‘밀실’ ‘춤바람’ 등으로 변질됐었지요.

하지만 이번에 함께 응원하는 하나의 장이 생기면서 인생은 즐기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줬어요. 한국과 포르투갈의 경기를 보러 가면서 10대 여중생들을 만났어요. 아마 힘든 입시지옥을 탈출해 수업을 빼먹고 왔을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한국이 승리하는 순간 춤을 추며 기뻐할 때 저도 춤추며 행복했어요. 힘든 과정을 이겨낸 운동선수를 보면서 청소년들에게도 교훈이 되고 새로운 문화도 이뤄질 것이라고 봅니다.

-한국팀의 급성장을 이끌어낸 이른바 ‘히딩크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4강 진출이라는 성적이 모든 것을 잠재워 버렸지요. 히딩크 감독은 우리 지도자들에게서 보지 못한 ‘겸손의 리더십’을 보여줬습니다. 이겼다고 잘난 체하거나 졌다고 좌절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통제하면서 선수들을 격려하는 모습이 어필한 것이죠. 하지만 그가 나라를 구할 것처럼 우상화해선 안 됩니다. 월드컵이 끝나는 시점에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지도자가 바뀌면 이렇게 화합하고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히딩크 감독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정치인이 또다시 지역주의를 얘기하면 문제가 되겠지요.

▽최〓축구 팬의 입장에서 한국과 선수들에 대한 히딩크 감독의 사랑이 느껴져요. 선수들이 “감독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에 잘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 때 이전 감독들은 어떻게 했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올까 의문이 생기더군요. 지도자가 선수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을 겁니다. 저도 여고시절에 농구 선수가 될까 하고 고민하던 중 체육관에서 체육 선생이 폭언 폭행을 일삼는 것을 보고 선수의 꿈을 접었습니다. 정치에서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진심으로 국민을 사랑하고 존중하는가를 반성해야 할 겁니다.

▽조〓히딩크 감독의 성공은 ‘합리성’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축구 선수를 선발할 때조차 지연 학연을 생각했던 게 사실입니다. 실력 있는 사람을 적시적소에 배치한다는 ‘당연한’ 원칙이 실천될 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가 하는 평범한 진리를 이번 기회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히딩크 감독의 운용방식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효율적 체제였는가를 구체적으로 반성해 볼 기회를 가진 것이지요.

-남녀, 노소, 빈부에 상관없이 전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자발적으로 응원을 펼치는 등 거국적인 호응과 ‘축제 한마당’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는데요. 사상 유례 없는 이 같은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축제와 함께 나타난 ‘스포츠 마케팅’이라는 비즈니스 마인드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 거리 축제 와중에 스티커를 팔러 나온 학생들, 태극기를 파는 아저씨, ‘8강 김밥’ 파는 아줌마 등이 건강한 마케팅의 모델이죠. 이런 마케팅이 모여서 축제가 더 확산된 것 아닐까요. ‘긍정적 지하경제’가 분출된 셈인데 이렇게 축제와 경제가 함께 하는 정신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그리고 ‘대∼한민국’의 구호와 장단이 농악의 장단이라는 점도 흥미 있는 일입니다. 서양사람들은 처음에 좀 따라하기가 힘들지만 한국인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우리의 유전자 속에 들어있던 문화가 드러나면서 퓨전적 축제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지요.

▽최〓사실 미술사를 공부한 입장에서 보면 붉은 악마들의 빨간색은 너무 원색적이라서 예쁘지는 않은 색이에요. 그런데 한 사람이 그 옷을 입으면 안 예쁘지만 여럿이 입은 모습은 아름다워요. 하지만 그 옷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는 소외감을 준 것도 사실이지요. 또 한 가지, 붉은 티셔츠에 ‘Be The Reds’라는 영어를 쓴 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인데 이는 한국인이 자신감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있다면 외국어를 쓸 것이 아니라 한국어로 했어야 합니다. 골든 슈, 골든 볼 등 외국어 남용사례가 위험 수위라는 점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조〓저는 약간 견해를 달리합니다. 그들의 영어 표기는 월드컵이 세계적인 행사이고 세계화가 이미 우리 현실에 깊숙이 와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삶의 방식이 바뀌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단순히 외래어 사용이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더라도 글로벌 스탠더드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미디어의 발달로 붉은 악마를 전 세계가 동시에 본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전 세계와 상호 교감을 이뤄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를 민족 자존심이 없다고 평가절하하기보다 세계적인 교류의 방식으로 영어를 선택한 것이라고 봅니다. 25일 독일과의 4강전에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카드섹션도 있었지 않습니까. 붉은 악마도 표현 방법에 대해 상당한 고민을 했을 것이고 ‘한글’의 자존심과 함께 전 세계와의 의사 소통 가능성을 고려했을 겁니다.

-이번 월드컵의 성공에 다들 환호하는 사이에 놓치거나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짚어봐야겠습니다.

▽이〓우선 놀이 쪽으로 너무 흘러버린 게 아쉽습니다. 정부가 나서서 놀이로 유도했고 7월1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했습니다. 기념관을 짓겠다, 히딩크 동상을 세우겠다는 등 천박한 행태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둘째는 지방선거, 탈북자 문제 등도 축구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인데 소홀히 한 것도 문제입니다. 월드컵이라는 큰 사건이 좋은 일이니 망정이지 만일 큰 위기 상황이 닥쳤더라면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을지 걱정이 듭니다. 2002년 5월과 7월이 뭐가 다를까요? 사람들은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은 마음이 들떠서 정신이 없지만, 세상은 노력을 해야 바뀝니다. 월드컵 열기에 세상이 좋아진 걸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택시 기사는 손님이 없다고 하고 농촌에는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 열기를 소외계층과 함께 나눠야 합니다.

▽최〓7월까지 끝내야 할 책이 2권이나 있었지만 월드컵에 흥분하면서 글을 쓸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내 인생에 언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하면서 위안을 삼지요. 이 한 달은 모두가 집단 치료를 받았다고 생각해요. 축구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누구나 삶이 불안하지만 이 기간만이라도 잊고 살 수 있다는 것도 좋은 거 아닐까요.

▽조〓전 국민이 월드컵에 몰입하면서 다른 부분이 엄청 비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몰입현상은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가 얼마나 불만 박탈의 사회였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적으로 월드컵 열기를 살려나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지요.

▽이〓축구가 4강에 올랐다고 나라가 잘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번 월드컵에서 확인한 한국인의 ‘가능성’을 가지고 좋은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축구 선수들을 배려하고 축구 인구를 늘리는 것 못지않게 현재 건설해 놓은 축구 경기장의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과도하게 지어놓은 경기장들을 잘 활용해 국민의 부담을 줄이고 다양한 스포츠와 놀이문화를 만들어 가야겠지요.

▽최〓월드컵은 제 인생의 가장 황홀한 축제였어요. 땀을 흘린 만큼 성과가 있었음을 확인했고 인간이란 참 아름다운 존재임을 새삼 느꼈습니다. 한번쯤은 미칠 수 있는 자유, 놀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축구장이 아닌 동네에서 어린아이들이 신나게 공을 차고, 백화점에서 자유롭게 노래 부르고 말이죠. 우리의 젊은 시절은 어두운 기억과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많았지만 후배들은 정말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정치인들이 월드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한국인들은 성숙해졌고 정치에 농락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이제는 월드컵 열기를 어떻게 잘 식혀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대중의 행위는 정해진 규칙 안에서 행하는 축구 경기와 응원을 통한 ‘안전한 일탈’이었습니다. 이제 이 열기를 일상화 제도화하는 방안이 필요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통해 사회체육을 일상화하고 주5일 근무제 실시와 함께 여가 문화도 제도적으로 활성화해야 할 것입니다.

▼참석자▼

이언오 삼성경제硏 상무

최영미 시인

조대협 고려대 교수

사회=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정리=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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