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월드컵]아르헨과 잉글랜드의 '축구전쟁'

  • 입력 2002년 6월 7일 19시 21분



스포츠의 기원이 전쟁이라는 설이 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유혈극을 스포츠가 대신했다는 것.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의 월드컵 경기는 이 설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잉글랜드와의 축구경기는 더 이상 경기가 아니다.”(아르헨티나의 일간지 라 나시온)

두 나라는 82년 포클랜드전쟁(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전쟁이라고 부른다) 이후 월드컵에서 두 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10주간 지속된 포클랜드전에서 영국은 700명의 아르헨티나인을 살해하면서(영국 희생자는 200여명) 승리했지만 월드컵 전쟁에서는 아르헨티나가 모두 승리했다.

“신이 우리를 보호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긴다.”(아르헨티나의 한 여행사대표)

“우리가 당한 굴욕에 대해 보복할 것이다.”(잉글랜드 대표선수 테디 셰링엄)

포클랜드전 2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일본 삿포로에서 7일 벌어지는 양팀의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양국은 소개령이 내려진 듯했다.

점심시간인 12시반에 경기가 시작된 런던 시내는 갑자기 한국발 공습경보가 울린 듯 텅텅 비었다. 영국인들은 함께 이 경기를 시청하기 위해 TV가 설치된 선술집으로 몰려갔다. 직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아예 호텔 회의실을 빌려 함께 시청하는 회사들도 있었다. 영국의 슈퍼마켓 체인인 세이프웨이는 구강청정제가 25%나 더 팔렸다고 밝혔다. 몰래 회사를 빠져나간 직장인들은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TV를 보고 온 것을 숨기기 위해 구강청정제를 입안 가득 뿌렸다. 영국의 기업주들은 노동인구의 3분의 1이 병을 핑계로 지각 또는 조퇴할 것으로 예상했다.

아침시간인 8시반에 경기가 시작된 아르헨티나에서는 2개 주가 경기가 끝날 때까지 공식 휴가를 선포했다. 초중등학교의 강당에는 TV가 설치됐다. 한 교사는 “이처럼 애국심을 심어줄 수 있는 교육이 따로 없다”고 말했다.

1200명의 경찰관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영국 대사관과 영국계 회사 주위에 배치됐다.

62년 이후 양팀의 역대 전적은 2승2패. 62년 칠레 월드컵 조별 리그에서 맞붙은 양팀의 경기는 잉글랜드의 3-1 승. 1891년 영국인 왓슨 허튼으로부터 축구를 처음 수입한 아르헨티나에서 이 경기결과에 격앙했다는 보도는 없었다.

양팀의 반목은 66년 잉글랜드에서 열린 준준결승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경기에서 아르헨티나의 주장 안토니오 라틴은 퇴장명령을 받았지만 강력히 항의하며 10분간 그라운드를 떠나지 않아 잉글랜드팀을 격분시켰다. 잉글랜드의 알프 람지 감독은 경기 후 전통적인 관례인 유니폼 교환의 거부를 지시했고 기자회견에서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짐승들’이라고 비난했다.

포클랜드전 이후 4년만인 86년에 열린 양팀의 멕시코 월드컵 준준결승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악랄한 속임수도 마다하지 않는 팀으로 잉글랜드에 각인됐다. 2-1로 아르헨티나가 이긴 이 경기에서 마라도나는 공을 손으로 쳐서 첫 골을 기록했고 심판은 이 광경을 보지 못해 골로 인정됐다.

그 이후 12년 동안 월드컵에서 조우할 기회가 없었던 양팀은 98년 프랑스 월드컵의 16강전에서 다시 충돌했다. 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격전 끝에 데이비드 베컴이 레드카드를 받아 퇴장했고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르헨티나가 4-3으로 승리했다.

당시 아르헨티나팀이 스타디움 밖에 세워놓은 버스를 타고 의기양양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본 잉글랜드팀의 베컴은“굴욕적이었다”며 지금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베컴은 이번 경기를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속임수를 써서라도 이기고 싶으냐”는 질문에“그렇다”고 말했다고 DPA통신이 전했다.

베컴이 이번 월드컵 출전이 불투명했던 것도 4월 유럽 챔피언스 리그에서 아르헨티나 출신의 알도 페드로 두스체르가 깊은 태클로 베컴의 왼쪽 발을 부러뜨렸기 때문.

영국의 반아르헨티나 감정을 반영하듯 영국에서 아르헨티나산 포도주의 판매가 16%나 감소했다. 반면 관심은 치솟아 이번 경기의 도박에 단일 경기사상 최대 규모인 모두 1450만달러(약 175억원)가 몰려들었다.

잉글랜드의 결전의지에 대해 86년 잉글랜드를 격파한 이후 아르헨티나의 국가영웅이 된 마라도나는“이번 경기는 영국인들이 얼마나 겁에 질려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줄 것”이라면서“축구화 속에 그들의 발이 떨고 있다”고 비웃었다.

아르헨티나팀의 골키퍼 파블로 카바예로는“이번 경기는 모든 아르헨티나인들이 기다려온 경기다. 특히 82년에 친구와 가족을 잃은 아르헨티나인에게는 더욱 그렇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양팀의 경기는 더 이상 축구가 아니었다

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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