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23) 잃어버린 얼굴과 무수한 발소리 23

  • 입력 2002년 5월 17일 18시 06분


무당3 꿈을 꿨어예 내가 죽은 사람처럼 두 손을 가슴 위에 딱 모으고 누워 있대예 햇살이 내 감은 두 눈 위로 쏟아지고

비 개인 후의 풀 냄새가 나고 강물 소리가 들리고 큐큐 파파 큐큐 파파 숨소리가 들리대예 큐큐 파파 눈을 뜨니까 큐큐 파파 태양이 비를 증발시키고

큐큐 파파 다리가 네 개 흔들리면서 다가와 큐큐 파파 어깨를 치길래 눈을 떴어예 밖은 캄캄했어예

언제부터인가 뒷자리에 내 또래 여자아들이 앉아 있었어예 어느 역에서 탔겠지예 나처럼 군복공장에 일하러 가는 애들이겠거니 했어예 다음 역은 대련 대련 십구시 사십오분 오후 일곱 시 사십오 분 도착입니다 차장이 그렇게 외치며 다니대예 대련에서 하룻밤을 자고 배를 탔어예 도착한 항은 시모노세키가 아니고 상해대예 모두들 치마 저고리 차림이었는데 원피스로 갈아 입으라고 했어예 빨강 파랑 하양 보라 노랑 분홍 내가 받은 것은 빨간 원피스였어예 그 다음에 생긴 일은 말로 할 수 없어예 딱 한 사람한테만 신세타령을 했지예 바로 이우철 씨라예

유미리 …어디서 만났죠?

무당3 대련에서 부산으로 가는 어선 속에서예

유미리 …할아버지가 대련에 갔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무당3 1945년 8월 15일 그 날은 군인들이 한 명도 찾아오지 않대예 청소부로 일하는

중국 사람들이 전쟁이 끝났다고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했다고 수근덕거렸어예 밖에 나가보니까 중국 사람들이 각목을 들고 돌아다니고 군인들은 시계를 뺏기고 얻어 맞고 있었어예

낙원에 있던 일본 사람들은 다음 날 아침 모두 사라지고 없었어예 우리를 버려두고 도망친 것이지예 중국 사람들이 낙원 문에다 둥근 종이를 붙이대예 옆 방의 시즈코가 중국 사람들은 우리가 일본 사람하고 한 패라고 생각하니까 죽일지도 모른다고 했어예 그래서 우리는 도망쳤지예 태양은 지글지글 타오르고 우리들 머리하고 어깨에 불똥을 떨구고 우리들 그림자까지 태웠어예 사방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예 키 큰 해바라기가 일본사람들처럼 눈을 번뜩이고 있었지예 미국 사람한테서 밀가루 배급을 받았어예 헐벗은 몸으로 헐벗은 밤을 보냈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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