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정희/이젠 대통령이 말할 때다

  • 입력 2002년 4월 24일 18시 42분


자식 자랑이 팔불출의 하나라는 것을 모를 사람이 없건만 자식이 잘되고 기특한 일을 하면 으레 자식 자랑을 하게 되는 것은 부모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도 일단 꾸짖긴 하지만 감싸고 이해해 주려는 것이 우리네 부모의 마음이다. 그것은 대통령이건 시골의 필부이건 다를 바 없다.

몇 주 전 김대중 대통령이 입원 치료를 받을 당시 김 대통령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들은 자식 사랑의 마음 때문에 건강이 악화된 것이 아닌가 우려했다. 장남, 차남에 이어 삼남 홍걸씨의 이름까지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니 마음 편할 수 있겠는가. 특히 홍걸씨에 대한 김 대통령의 사랑은 더욱 애틋할 수밖에 없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김대중 납치사건과 연금, 그리고 광주항쟁의 와중에서 충격이 컸을 막내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안쓰러움도 혼재되어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에 이의를 달 국민은 한 사람도 없다.

▼침묵할수록 국정 더욱 꼬여▼

그러나 세 아들과 연루되어 드러나고 있는 비리 의혹에 대해 김 대통령이 침묵으로 일관할 시점은 이미 지났다. 대통령의 명확한 입장 표명 없이 비리의혹이 제대로 풀릴 것으로 믿는 국민은 많지 않다. 세 아들과 관련된 비리의혹은 청와대, 검찰, 경찰, 아태재단, 벤처기업,바다 건너 미국으로까지 일파만파 확대되고 있는데 대통령은 수사 진행상황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비리의혹을 파헤쳐야 할 청와대와 검찰, 그리고 경찰이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경에 이르렀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은 이미 시험대에 올려진 상태고, 경찰청 수사국장은 미국으로 도피한 최성규 전 경찰청 특수수사과장과의 통화를 며칠 지나서야 보고하는 형국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김 대통령과 청와대도 동일체로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최규선 게이트’를 비롯한 각종 비리 의혹에 연루되어 청와대 비서관과 직원이 속속 구속되고 있다. 김 대통령이 입장을 표명해야 청와대도 수사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김 대통령은 조속히 본인의 입장을 밝혀야 한다. 김 대통령이 침묵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될 소지가 크다. 검찰은 눈치보고, 경찰은 버둥거리고, 청와대는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국정의 틀이 흔들리고 있다. 김 대통령을 여론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충정이었는지, 야당에 대한 맞불작전으로 계획된 것인지 모르지만 본인이 직접 들어보지도 않은 테이프의 내용을 자신만만하게 기자회견을 통해 폭로하는 제2, 제3의 국회의원이 또 나오지 않을지 정말 걱정스럽다. 자신의 거짓말에 책임지지 않는 뻔뻔한 정치인은 정치무대에서 사라져야 한다.

김 대통령 세 아들의 비리 의혹을 둘러싸고 여야 간에 오가는 언어의 수준은 온 국민을 짜증나게 한다. 모처럼 국민참여 경선제로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높아지고 있을 즈음 세 아들의 비리의혹을 둘러싼 여야의 정치공방과 극한적 대립으로 국민의 정치에 대한 애정의 싹에 찬물을 끼얹었다.

비리의혹의 규명 없이 선거 정국에 돌입하면 정국은 정당과 후보간의 정정당당한 정책 대결이 아닌 폭로전과 음해와 헐뜯기로 계속될 것이 뻔하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월드컵 기간 중 대통령 세 아들을 둘러싸고 정치권이 이전투구의 모습을 보인다면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 대통령은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 정면 돌파의 전략을 구사해 그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전환시켜온 저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김 대통령 자신을 위한 기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종 우리 정치를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지난 재보선 이후 민주당 내의 갈등을 당총재직 사퇴로 풀었고, 그 결과 민주당은 집단지도체제와 당권과 대권의 분리, 그리고 역사상 초유의 국민참여 경선제를 채택해 당내 민주화의 초석을 놓았다.

▼대통령직 걸고 엄정수사 보장을▼

이제 김 대통령은 결단을 내려 세 아들과 관련된 비리 의혹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자식 사랑을 나라 사랑의 차원으로 승화시켜 현 정국을 풀고 우리의 정치풍토와 정치문화를 바꾸어야 할 시점이다. 대통령의 가족과 측근을 둘러싼 모든 의혹은 다른 어떠한 비리 의혹보다 철저하고 투명하게 수사해 진실을 밝히는 전례를 남긴다면, 그리하여 이후 대통령 친인척의 비리가 우리의 정치에서 사라진다면, 이 또한 김 대통령의 큰 정치적 족적으로 남을 것이라 확신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육성이 듣고 싶다. 검찰과 경찰의 엄정하고 성역 없는 수사를 대통령직을 걸고 철저하게 보장하겠다는 짧은 언명이면 충분하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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