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금룡/‘사이버 벤처’ 솎아낼 때

  • 입력 2002년 1월 17일 18시 12분


최근 우리 사회에는 정치인답지 못한 정치인, 부모답지 못한 부모처럼 ‘무엇답지 못한’이라는 수식어가 팽배해 있다. 이번 윤태식 게이트도 관료답지 못한 관료, 벤처인답지 못한 벤처인이 빚어낸 한바탕 촌극으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합리의 병폐가 또다시 부끄러운 속살을 드러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곱씹어 생각해 볼 점은 이러한 문제가 특정 계층에서 매우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에서 시작하며, 이를 치유하기 위한 처방이나 대책이 임시방편으로 이루어짐으로써 근원적인 해결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를 종횡하던 모럴 해저드의 악령이 이번에는 벤처인의 허울을 쓴 일부 인사들을 통해 또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최근 사건으로 벤처는 마치 모럴 해저드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내려앉은 사상누각으로 인식되고 있고, 로비와 부정이 벤처의 유일한 비상구처럼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윤태식씨가 언론 등을 통해 벤처인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이는 정확하지 못한 표현이다. 그에게는 그저 벤처인의 가면을 쓴 채 온갖 편법과 술수로 자신의 잇속을 채우려는 야심가의 추악한 얼굴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벤처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세우고, 보다 날카로운 감찰로 사이비 벤처인을 솎아내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특히 일부 사이비 벤처인들을 벤처라는 이름과 분리시키고 이들에 대해 일벌백계의 단호함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벤처의 옥석을 구별하기 위해 무엇보다 벤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잣대와 건전한 벤처를 육성할 수 있는 제반 인프라를 마련해야 한다. 지금처럼 벤처 캐피탈 회사가 총 주식의 10% 이상만 투자하거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R&D) 비용이 5%만 넘으면 벤처기업으로 인정받는 등 벤처기업 정책이 질보다는 양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시정되어야 한다.

특히 지금까지의 벤처기업 확인제도는 단지 수를 늘리는 데만 기여했지, 벤처 선정 이후의 입체적인 사후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문제를 낳아 왔다. 벤처기업으로 선정된 이후 당초의 조건에서 벗어나더라도 여전히 벤처기업으로 남아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의 벤처 육성정책이 단지 수적 양성에만 목표를 두고 질적인 방향에서의 감찰과 지도는 부족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180여개 기업이 등록하는 동안 단 6개 회사만 퇴출되는 코스닥시장과, 150개의 기업이 모인 제3시장의 거래규모가 코스닥 한 개 기업의 시가총액에도 못 미치는 현실, 기업분석 능력도 갖추지 못한 창투사가 난립하는 등의 금융시스템 부재 등도 벤처 발전의 발목을 매는 오랏줄이 됐다.

아울러 벤처가 제대로 발전할 수 있으려면 보다 선진화된 지원책과 다양한 시스템을 마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최근 일련의 사태로 벤처인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는 배려도 필요하다.

사실 요즘 잇따른 벤처비리 사건으로 충격과 고통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은 다름 아닌 벤처기업들이다. 기술과 노하우로 경쟁에 나서는 선량한 벤처인들에게 가장 큰 상처는 실추된 명예에 있다. 특히 일부 사이비 벤처인의 모습을 전체 벤처인들의 윤리의식으로 확대 해석함으로써 그들의 생산적인 에너지가 비생산적인 곳으로 누수되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다. 윤태식, 진승현, 정현준과 같은 이들의 이야기는 대다수 정직한 벤처인들에게는 그들만의 이야기로 여겨질 뿐이다.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주최한 벤처CEO 신년 세미나에서 필자는 인터넷과 디지털이란 주제로 많은 벤처기업인들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진지한 대화와 토론을 나눈 적이 있다. 적어도 이들에게 최근의 여러 벤처비리 사건은 먼 나라의 얘기임에 틀림없었다.

사이비 벤처인을 솎아내는 일은 분명히 중요하지만 벤처 사정이란 미명 아래 마치 아픈 사람을 멍석말이하듯 벤처인과, 그들의 윤리의식과 도덕관을 싸잡아 때리는 것은 교각살우(矯角殺牛)의 과오를 범할 수 있다. 다시금 벤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벤처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선택한 신경제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이 금 룡 인터넷기업협회 회장·㈜옥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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