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윤용만/역사의 가정

  • 입력 2001년 12월 28일 17시 44분


1914년 6월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울려 퍼진 한 방의 총소리가 세계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총격을 받기 전에 먼저 폭탄테러를 받았으나 자동차의 포장 덕분에 다치지 않고 시종이 대신 부상했다. 부상한 시종의 병 문안을 가려고 차를 돌릴 때 운전사가 길을 잘못 잡아들어 총격을 당해 피살된 것이었다. 만약 운전사가 병원으로 가지 않고 곧장 숙소로 향했더라면 제1차 세계대전은 발발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지만 어느 때보다 다사다난했던 신사(辛巳)년이 저물어 가는 이때 만약의 상상을 펴보기로 하자. 올해는 유난히 미국 플로리다주가 역사의 조명을 받은 한해였다. 올 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플로리다주의 재검표가 끝까지 이뤄졌더라면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앨 고어가 근소한 차로 조지 W 부시 현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됐을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두 진영이 재검표를 놓고 소송에 소송을 거듭하던 당시 플로리다주에는 그 유명한 악어보다 변호사가 더 많았다고 하니 양 진영의 공방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만약 고어가 당선됐더라면 과연 9·11 테러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까? 답은 아마도 ‘노(No)’일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 대통령선거 사상 최초의 유대인 부통령 후보였던 민주당의 조지프 리버맨 상원의원 때문에 당시 많은 아랍계 단체들은 공화당의 부시 후보를 지지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 부통령을 가진 미국 정부가 들어섰더라면 9·11테러 사건은 피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시기가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테러분자들이 비행기 조종술을 배운 곳도, 그리고 탄저균이 처음 발견된 아메리칸 미디어사도 플로리다주에 있다. 테러사건으로 인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더 이상 확산되지 않고 종결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 플로리다가 제2의 사라예보가 되지 않았으니 인류 역사에 커다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임오(壬午)년 새해에는 지구촌에 평화와 화해만이 가득하기를 빌며….

윤용만 객원 논설위원<인천대 교수·경제학>

ymyoon@inche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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