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유윤종/무시당한 한국 연주시장

  • 입력 2001년 12월 9일 18시 04분


12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러시아)의 내한 연주회가 ‘도쿄 리허설’을 이유로 돌연 취소됐다.

사태의 발단은 레핀의 소속회사인 IMG사가 서울 공연 다음날인 13일에 일본 도쿄 공연을 갖기로 한데서 비롯됐다. 일본측이 13일 공연에 앞선 리허설 일정을 오후 1시30분으로 잡자 IMG가 한국측에 공연 취소를 요청해 온 것이다. 레핀이 12일 밤 공연을 마친 뒤 13일 아침에 서울발 도쿄행 첫 비행기를 타더라도 리허설 시간에 맞춰 공연장에 도착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레핀의 국내 공연을 기획한 마스트미디어는 이에 대해 “이미 티켓을 팔기 시작했다”며 버텼으나 레핀측의 요청이 워낙 강력해 배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도쿄의 ‘리허설’ 일정에 밀려 한국의 ‘본 공연’이 취소되는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공연기획사인 영예술기획의 최지영 실장은 “레핀측이 두터운 음악팬을 가진 일본의 눈치를 봐야 했을 것이다. 한국 인구가 일본의 3분의 1 정도이지만 클래식 시장의 경우는 한국이 일본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60년대 이후 국제 클래식 기획사들은 한국 시장을 일본 공연의 ‘덤’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한 국내 공연기획사 사장은 “국제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음악가가 일본에서 5, 6회 공연을 갖는다면 한국에서는 1회 꼴로 공연한다”고 전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유명 음악가를 국내에 불러오려고 해도 공연기획사들은 일본 일정을 먼저 알아봐야 한다.

이에 대해 한국 음악계는 “일본 일정에 끌려 다니는 우리 음악계의 현실을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이라며 씁쓸해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 문화행사에서 ‘일본을 꼭 앞서야 한다’는 우리 문화계 인사들의 다짐이 구두선에 그치지 않으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 듯하다.

유윤종<문화부>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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