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넓히기]도정일/교육의 핵심은 독서

  • 입력 2001년 11월 23일 18시 40분


어느 대학의 영어 관련 학부 강의에서 문화이해력 테스트를 위한 어휘시험이 치러졌는데, 출제된 문제들 중에는 ‘The Book of Genesis(창세기)’, ‘jihad(이슬람 성전)’ 같은 말의 우리말 상응어를 쓰게 한 것이 있었다 한다. “명답이 쏟아졌다”고 담당 교수는 말한다. ‘The Book of Genesis’를 ‘유전자 책’ 혹은 ‘유전의 책’이라 쓴 답지가 있는가 하면 ‘jihad’는 그냥 발음 그대로 ‘지하드’라 적은 경우가 태반이고 ‘테러조직’이라 쓴 답안도 있었다고 한다.

담당 교수가 더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말 어휘의 영어 번역에서다. 자유민주주의, 국민국가, 자유시장경제 같은 상식적 용어를 냈는데도 제대로 쓴 사람은 수강생 40명인 A번에서 네 명, 50명인 B반에서 24명이었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한다는 나라의 대학 영어학부생 90명 중에 ‘자유민주주의’를 영어로 바르게 쓴 정답율이 3분의 1도 안 된다. 이게 학부 1학년도 아닌 3년생들의 경우라는 것을 알면 놀랄 사람 많을지 모른다. 문제의 어휘들도 무턱대고 출제된 것이 아니라 강의 때 읽히거나 읽도록 사전 고지된 텍스트에서 나온 것이라면 놀랄 사람은 더 많다.

그런데 이건 놀랄 일도, 남의 집 얘기도 아니다. 그게 지금 한국 대학의 현실이다. 학생들은 책을 읽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토론하지 않는다. 지금이 영상시대이고 인터넷 시대라니까 책 같은 건 정말 안 읽어도 되는 줄 안다. 죽지 못해 읽어야 할 때만 조금 읽고, 그것도 시험 범위에 든 텍스트의 일부만 복사해서 꽁무니에 차고 다니며 읽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시험 끝나면 버리기 바쁘다. 책의 향기? 곰팡이 냄새라면 몰라도 책에서 향기 나다니, 우리 대학생들에게는 한참 생소한 소리다.

그래도 막이 올라야 하듯 책은 읽혀야 한다. “책 읽을 줄 알게 하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라는 자크 바전의 말은 교육의 장에서 진리이다. 서양문화사를 가르쳐온 94세의 노교수 바전은 작년 ‘새벽에서 데카당스까지’라는 8백 쪽이 넘는 책을 냈는데 15세기에서 현대까지의 서양문화 500년을 다룬 이 책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니 미국 사정은 우리와는 퍽 다른 데가 있어 보인다. 독서 인구가 무엇보다도 대학에서 길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학기초에 뉴욕 테러가 나는 바람에 나도 담당 과목의 실라버스를 상당히 바꿔 가면서 사태와 관련된 글과 책들을 읽히고 토론하는 쪽으로 학생들을 유도해 봤는데, 예상대로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이 핵심용어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모더니티를 거부한다는 식의 대목이 나오면 학생들은 우선 ‘원리주의’에서 딸꾹질하고 ‘모더니티’에서 걸려 넘어진다. 단어는 아는데 개념은 모른다. ‘세속주의’(secularism) 같은 말을 만나면 눈이 멍해진다.

문화이해력(cultural literacy)을 높여주기 위해 이번 학기에 내가 영문과 학생들에게 권고한 책들 중에는 대니얼 부어스틴의 ‘탐색자들’, 헌팅턴과 해리슨의 ‘문화가 중요하다’ 같은 책도 들어 있다. 이 책들은 국내 번역도 나와 있다. 이런 책을 읽자면 상당한 비판적 안목도 필요한데 언제 그 수준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읽어야 하고 읽혀야 한다.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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