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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7월 23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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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현씨의 첫 비평집 ‘판도라 상자 속의 문학’(민음사)은 우리에게 비평 읽기의 진정한 재미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아울러 한 권의 비평집이 문단에서 일종의 상징권력을 얻게 되는 전형적인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 비평집은 무엇보다도 비평가 자신의 ‘읽는 맛이 느껴지는 평론’에 대한 애착이 두드러지게 표출되고 있는 비평집이다. “나의 경쟁 상대는 다른 ‘평론’이 아닌 ‘소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저자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비평관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것일 터이다. 물론 이러한 비평적 태도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여기서, 독립적인 예술 장르로서의 비평의 자율적 역할을 환기시켰던 김현의 존재와 비평의 독자성과 매혹을 유달리 강조했던 몇몇 90년대 비평가들의 주장을 상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김미현식 비평’의 특성은 시종일관 현란한 메타포와 기발한 ‘이름 붙이기’를 통해서 작품을 읽어낸다는 사실에 있다. 저자의 감식안과 행복하게 조우하는 비평 대상을 만났을 때, 김미현의 이러한 비평적 개성은 한껏 발랄하게 표출된다. 특히 소설가 은희경에 대한 글들은 작가의 심리와 작품에 숨어 있는 메시지를 비평가 특유의 재치 있는 비유와 촌철살인적인 명명법에 의해 요령있게 파헤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아마도 김미현에 의해서 90년대 중반부터 활동한 주요한 여성작가들의 내밀한 욕망의 구조가 독특한 비평적 조명을 받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책에 수록된 상당수의 글들은 분석의 깊이와 섬세하고 치밀한 논리적 전개, 정확한 문장 등의 덕목을 포기한 대가로 얻어진 “명명 그 자체의 수사적 진술”(이광호)에 불과하거나, ‘비유 그 자체를 위한 비유’에 머무는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했을 때, 그녀의 비평은 치밀한 논리적 대결과 적확한 감수성에서 비롯되는 ‘비평의 즐거움’보다는 수사학적 장식에 과잉 투자한 ‘키치적 비평’에 가깝게 다가선다.
김미현씨는 “소통되지 않은 평론은 축구에서의 자살골만큼 비생산적이다”라고 쓰면서 자신의 ‘읽히는 평론’을 적극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비평의 깊이와 정교한 논리를 ‘소통’과 맞바꾼 비평의 하방(下放)현상일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논리적 곡예의 아름다움과 의미 있는 난해함이 비평(에세이)에서 적극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장르에서 이론의 전면적인 모험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의미에서 비평은 오히려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소수자의 집요한 논리적 모험이 적극적으로 요청되는 망명자의 장르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 즈음의 비평계는 오히려 제대로 된 난해한(?) 비평적 에세이가 너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수사학과 명명법에 대한 김미현씨의 남다른 열정이 분석적 깊이와 섬세한 논리적 기획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그러했을 때 “그의 비평으로부터 우리 문학은 새로운 비평적 동력을 얻게 되었다”(이광호)라는 주장은 동료 비평가에게 문화적인 상징권력을 부여해주는 상투적인 예찬이 아니라 김미현의 비평적 재능과 잠재력에 대한 적절한 의미부여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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