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읽는 책]김용택-장욱진 유화 · 카탈로그 레조네

  • 입력 2001년 4월 6일 18시 49분


◇봄날 그림에 취해

김용택

산골에 해가 진다. 달이 떠 있는 하늘은 높이 파랗다. 가시덤불이 우거진 앞산에 고향을 떠나지 못한 어른들 같은 굽은 소나무 몇 그루가 싱그럽게 푸르다. 산아래 강가에는 새 풀들이 돋아나 저무는 강물을 초록으로 잔잔하게 물들인다. 텃밭에서는 농부들이 거름을 뿌리느라 부산하다. 우리 집 뒤 빈터에 하얀 매화꽃이 한 그루 피어 있다. 장욱진이 많이 그린 흰 꽃나무다. 푸른 하늘 하얀 달 속으로 새가 세 마리 날아간다.

1976년경 이든가 나는 장욱진의 산문집 ‘강가에 아틀리에’라는 에세이집을 샀다. 그이가 덕소에 있을 무렵이었나 보다. 그의 에세이 집 첫 페이지에 보면 “나는 심플하다”라든가“나는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노라”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의 단순한 이 말을 넓고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근황을 소개하는 기사가 나오면 나는 모두 오려 두었다. 시골 마을의 툇마루에 앉아 있는 그의 깡마른 모습, 그의 단순하고 생략된 고요, 그리고 고독이 나는 좋았다. 그리고 그는 언젠가 박목월 선생이 만든 ‘심상’이라는 시 전문지 표지에 집, 새, 나무, 강, 강아지, 아이들을 먹으로 많이 그렸다.

지난 겨울 나는 드디어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열리고 있던 그의 10주기 회고전을 보러 갔다. 아, 내가 정말 놀란 것은 그의 그림의 크기였다. 손바닥만한 세상에다가 ‘창조’해 놓은 세상은 참으로 아릅답고도 눈물겨운 세상들이었다.

우리 반 1학년 학수가 세상에 나와 처음 크레파스로 그린 천진스러운 집과 아버지 어머니 모습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좋은 그림은 그림이 아무리 작아도 작아 보이지 않고, 아무리 커도 커 보이지 않는 법임을 나는 새삼 확인했다.

나는 박수근과 오윤의 화집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 두 권의 그림책은 늘 머리맡에 두고 본다. 그러다가 이번에 나는 ‘장욱진 유화―카탈로그 레조네’(정영목 지음·학고재·2001년 1월)를 구했다. 이제 내가 아끼는 그림책은 세 권이 되었다. 나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장욱진 예술과 인생의 창고인 이 화집 속을 들랑거린다. 늘 들어가 봐도 항상 신기한 세계가 거기 수도 없이 펼쳐진다.

이 글을 여기까지 쓰는 동안 날은 어두워지고 달빛이 강물에 떨어졌다. 산골은 눈물이 나오게 적막하다. 달, 산, 강, 집, 개, 하얀 꽃나무들이 그의 화집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와 제자리로 간다.(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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