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일대기]신화 역사속에 사라지다

입력 2001-03-22 01:16수정 2009-09-21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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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은 바윗장처럼 크고 투박했다. 굵은 마디에 거친 손바닥, 검게 탄 손등. 재벌회장답지 않은 그 손은 80여년 이력의 ‘기록’이었다.

하루종일 땡볕 밭에서 일해도 배가 고팠던 소년 정주영이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을 때 가진 것이라곤 단돈 50전과 그 두 손뿐이었다. 그때마다 소년을 쫓아온 아버지는 타일렀다.

“너는 소학교밖에 못 나온 무식한 촌놈이야. 서울엔 대학까지 나온 실업자가 들끓는다는데 네가 잘 되면 얼마나 잘 되겠느냐.”

3번이나 아버지의 손에 끌려 내려갔지만 소년은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라도 하듯 손을 꽉 쥐었다.

그후 70년. 그 억센 손은 한국 재계, 또 한국 현대사에 전례없는 ‘신화’를 일궈냈다.

그리고 2001년 3월 21일. 그 신화는 완전히 ‘퇴장’했다. 그의 죽음은 한국경제에 있어 한 시대의 폐막을 알리는 신호로도 들린다.

정주영(鄭周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프런티어 정신, 한국경제의 건설자, 미래를 읽는 최고의 승부사,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들을 일으켜 진격하게 만드는 마력….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은 ‘정주영 신화’의 처음과 끝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그가 이룬 성공의 이면에는 깊은 ‘그늘’이 있었다. 그의 ‘돌격주의’가 끌고 들어간 함정은 한국경제의 왜곡에 상당 부분 책임을 져야 할 부정적 유산이 됐다. 재벌체제의 무분별한 확장과 정경유착, 왕조적 통치, 노동자 억압 등은 그의 영광 뒷면에 불명예로 남았다.

고 정주영 전 현대명예회장은 지금은 북녘땅인 강원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1915년 11월25일 태어났다. 아버지 정봉식(鄭捧植)씨와 어머니 한성실(韓成實)씨의 6남2녀 중 장남.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부지런한 농부였으나 살림은 늘 쪼들렸다. 가난은 당시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모진 숙명처럼 보였으나 소년 정주영은 굴복하지 않았다. 초등학교만 마치고 농부가 된 정주영은 4번의 가출 끝에 서울에 올라온다.

그는 쌀가게 점원으로 취직한다. 그러나 타고난 성실과 근면성은 금세 빛을 발했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주인으로부터 쌀가게를 인수받은 것이 금싸라기같은 사업 밑천이 됐다.

자동차수리공장을 세워서 착실히 돈을 모은 그가 사업상 전기를 맞은 것은 1947년 현대건설의 전신인 현대토건사의 설립이었다.

정주영은 미군이 발주한 전시 긴급공사와 휴전 후 토목건축공사를 따내면서 건설업계의 새 강자로 뛰어올랐다.

그의 사업적 감각과 미래를 내다보는 눈은 가히 본능적이었다. 게다가 시운도 그를 도왔다. 현대건설은 강력한 공업화 정책을 펴는 군사정부의 대형 건설 사업을 잇따라 따냈다.

박정희 전대통령과의 대표적인 ‘합작품’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이었다. 68년 착공된 이 공사에서 정주영은 신들린 듯 현장을 뛰어다니며 공사를 지휘한 끝에 2년5개월이라는 세계 최단기간 완공 기록을 세웠다.

해외시장에 깜짝 진출, 한국 기업에 새 장을 연 것도 그였다. 선진국 건설회사를 물리치고 태국에서 고속도로 공사를 따낸 것은 그때까지 국내시장의 울타리에 머물던 한국기업의 지평을 넓혀준 사건이었다. 이는 뒷날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코리안 돌풍을 일으킨 ‘중동 붐’으로 이어졌다.

그는 ‘현장의 사나이’였다. 그 자신이 원래 노동자였듯 거친 현장에서 옷을 걷어붙이고 노동자들을 지휘하는 그의 모습 자체가 개발연대의 한 표상이었다.

그는 60년대 중반부터 모태인 건설업 외에 다른 업종으로도 활발히 진출했다.

정주영의 탁월한 미래 안목을 보여주는 것은 자동차 산업에의 진출이었다. 그는 장래의 유망산업을 자동차산업으로 보고 주저없이 뛰어들었다.

조선의 불모지에서 현대중공업을 세워 세계 최대 조선소로 키운 과정도 극적인 드라마였다. 조선소 자동차 중화학 등 그가 시작한 사업은 항상 절대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뚝심과 결단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그는 77년부터 한국 재계를 이끄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을 맡아 5번 연임하면서 재계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러나 이것은 ‘연습’이었다. 그는 ‘경제대통령’으론 만족할 수 없다는 듯 아예 정치 외도를 감행했다.

92년 대선. 현대의 자금력을 활용해 출마한 ‘대통령의 꿈’은 참패로 끝났다. 그리고 조용히 지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화려하게 ‘재기’했다. 98년 그는 10년 전에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면서 구상했던 대북프로젝트를 현실로 옮겼다. 소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가는 분단 이후 초유의 이벤트는 온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방북은 마침내 금강산 관광과 남북해빙으로 이어졌다.

말년의 그는 평온하지 못했다. 그는 날로 지치고 쇠잔해졌다. 그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현대와 집안에 닥친 ‘재난’이었다. 확고부동한 것처럼 보였던 현대는 그 자신의 확장주의의 ‘업보’인양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현대호의 미래가 불투명해진 것이다.

‘50년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이 갑작스럽기까지 한 것은 바로 이런 ‘미완의 숙제’ 때문이다.

<김동원기자>davi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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