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읽는 책]김성기-회색인

  • 입력 2001년 3월 16일 18시 53분


◇다시읽는 최인훈

“김형은 요즘 뭣에 관심이 있어?” 한 선배가 나에게 물었다. “최인훈이요, 그의 ‘회색인’을 읽고 있어요.” 이런 응답에 그는 사뭇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명색이 사회학자란 놈이 무슨 늦바람이 불어 63년에 발표된 작품을 지금 읽느냐는 투였다.

하기야 이 작품은 대학 시절 우리 세대에게는 ‘광장’과 더불어 필독서가 아니었던가. 헌데 이번에는 단순히 소설이 아니라 ‘우리시대의 큰 이야기’로 읽었다. 참 오랫만에 군데군데 밑줄까지 그어가며.

‘회색인’은 그뒤 77년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한 최인훈 전집의 제2권으로 들어가 있다. 시대 배경은 50년대 말. 주인공 독고준은 전쟁의 와중에 북의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온다. 삶의 뿌리를 뽑힌 탓에 현실은 낯설기만 하다.

그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그러면서 고통스런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사고의 추이를 주시하고 표현하는 관념 소설이라는 평가가 말해주듯 이 작품에는 논리와 사색적인 진술이 많다. 이런 식이다.

“만일 우리나라가 식민지를 가졌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식민지 없는 민주주의는 크나큰 모험이다.” “어떻게 해 볼래야 해 볼 수 없는 그런 환경이란 게 있어. 우리의 지금 상태가 그것 아냐?” “이상한 현실이야. 우리 사회에는 절망이라는 활자는 있으나 절망은 없어.” “언어와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골짜기를 뛰어넘는 길은 막혀 있었다.”

‘나갈 길 없는 지평선’ 앞에 선 이들의 자화상이다. 논리가 통하지 않는 세계에 갇혀 어찌할 바 모르는 젊은 세대의 고뇌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은 대학생에 지나지 않지만 작가는 이들의 눈과 입을 빌어 뒤엉킨 혼돈의 현실을 지적으로 분해하고 비판하여 그것을 속속들이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운명의 굴레를 지성의 힘으로 이겨내려 한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 지식인의 전범을 처음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회색인’ 이후 우리 지식인의 현실 통찰은 얼마나 깊고 성숙해졌는가? 이렇게 자문하니 참으로 아뜩하다.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눈으로 급변하는 현실을 조망하고 진단할 능력이 있는가?

바로 이 물음을 ‘회색인’은 아프게 환기시킨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작가의 폭넓은 비전을 아직도 우리 지식사회는 제대로 딛고 넘어 서지 못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래서 최인훈을 다시 꼼꼼히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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