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이상한 구조조정

  • 입력 2001년 3월 2일 18시 32분


미국을 대표하는 교향악단 가운데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있다. 뉴욕시민의 자존심으로 여겨지는 이 교향악단은 1972년 미국이 불황의 늪에 빠졌을 때 경영난에 허덕이던 뉴욕필하모닉과 뉴욕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합병해 만들어진 것이다. 합병 직후 악단측은 연주자 전원을 해고한 후 원점상태에서 수개월간의 선발테스트를 거쳐 소수정예 단원들만 다시 추린 결과 뉴욕필은 세계 정상에 등극하게 됐고 경영도 초우량상태가 됐다.

반대되는 경우 하나. 일본경제의 장기불황으로 경영난에 봉착한 도쿄필하모닉과 신세이니혼 두 교향악단이 작년 5월 합병해 태어난 도쿄필은 단원을 한 명도 해고하지 않아 연주자가 170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규모의 오케스트라가 됐다. 그 후 경영난은 계속되고 있으며 연주 때마다 단원간 불화가 심각하다는 후문도 있다.

▼합병해도 인원감축 없다고?▼

이 상반된 사례는 두 나라 고용문화와 함께 구조조정을 추구하는 당사자들의 의식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구조조정이 조직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목적이 있는 이상 당연히 지출비용은 최소화하고 수익을 최대로 높이는 방향으로 개혁은 이뤄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인원축소는 비록 구조조정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필요조건에는 해당한다. 그것을 거부한 도쿄필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발전할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지만 상식선에서 전망하자면 대단히 험난한 길을 가게 될 공산이 크다.

그런데 바로 우리의 은행들이 도쿄필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작년말 합병을 선언한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경영진은 합병 후에도 점포수를 줄이지 않고 자연감소 외에는 인원도 감축하지 않겠다고 노조에 약속했다. “점포를 줄이는 것이 오히려 고객을 빼앗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는데 참고로 두 은행 지점들 중 66%는 걸어서 5분 남짓의 거리인 반경 500m 이내에 함께 있다.

여기서 당연히 제기되는 의문은 ‘그렇게 인원과 점포수를 줄이지 않으려면 구조조정은 왜 하나’라는 것이다. 구조조정이 손실 요인을 제거해 부실을 털자는 것인데 노조의 파업예고 때마다 정부는 즉각 인원 감축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해 스스로 구조조정의 목적과 목표를 부정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한 은행장은 평소 “두 은행은 많은 점포가 붙어 있어서 합병해도 시너지효과가 없고 합병하면 최소한 1만명 이상의 유휴인력이 나올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 소신은 합병선언과 함께 실종됐다.

과거의 예를 통해 은행간 합병의 성공여부를 전망하라면 ‘글쎄올시다’ 정도다. 25년 전 합병한 서울은행과 신탁은행에는 아직도 두 은행 출신간의 갈등이 남아 있고 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이 합병해 태어난 한빛은행의 경우도 두 개의 노조가 상존한 가운데 타 은행출신 상사에게 대들기가 성행하고 있다. 화학적 결합보다 뿌리를 중심으로 한 물리적 혼합이 합병은행들을 멍들게 하고 있는 터에 우량이라고 자부해 왔던, 그래서 자존심 강한 국민 주택 두 은행의 경우가 어떠할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이런 일이 은행에서만 일어나고 있을까. 정부가 주도한 이른바 빅딜로 탄생한 철도차량 항공부문 등의 통합법인에는 합치기 전 회사 수 만큼의 노조들이 그대로 존재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회사측과 노사협상을 벌이고 있다. 국민의 지원자금이 들어간 이 회사들이 제대로 굴러가지 못해 추가로 부실이 발생된다면 그건 다시 국민부담으로 이어지게 된다.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정부 내에서도 요즘 자성의 소리가 높다고 한다.

▼실업은 정부가 풀어야할 숙제▼

더욱 웃기는 것은 민간기업에 구조조정을 하라면서 고용안정까지 주문하는 정부의 모습이다. 그렇게 하고도 경쟁력만 가질 수 있다면 선진국 기업들이 왜 그 좋은 방법을 지금까지 쓰지 않았겠는가. 실업은 정부가 주축이 돼 경제주체들 전체가 풀어야 할 숙제인데 기업에만 책임 지우려 하는 모습이 비겁해 보인다.

근로자를 더 많이 해고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불가피하게 나가야 할 희생대상이 있다면 솔직하게 실상을 알려주고 정부주재로 차선의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피차에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다. 정부가 고용승계라는 화려한 포장지로 고통이 수반되는 개혁의 목적을 덮으려 할 때 이상한 구조조정은 끝없이 계속되고 우리 경제는 속으로 속으로 더 깊숙이 멍들어가기만 할 것이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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