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 엄마의 와우! 유럽체험]마녀의 도시 고슬라

  • 입력 2001년 2월 23일 16시 05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 하노버에서 불과 한시간 거리. 기차에서 나우에게 삶은 달걀 두 개 먹이고 동화책 두 권 읽어주고 나니, 어느새 고슬라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고슬라는 10세기경부터 은광이 터져 나온 축복의 땅. 은광 채취를 위해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었고, 1050년 하인리히 2세가 이곳에 궁전을 지으면서 문화와 권력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곳입니다. 중세 시가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적지로 지정한 도시더군요.

고슬라의 구시가 쪽으로 걸어가면,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가옥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채 과거의 영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슬비 속에 서있는 잿빛 성벽은, 오늘 따라 중세의 전설로 우리를 안내하는 전령으로 보이네요.

비가 그치지 않아 나우 유모차에 비닐 커버도 씌우고, 우리는 엉거주춤 모자를 눌러씁니다. 그나마 방수 장치에 신경을 쓰는 우리는 확실한 이방인. 독일인들은 비가 와도 우산을 쓰는 일이 거의 없고, 그대로 비를 맞으며 걷습니다. 아이들도 그대로 비를 맞추고, 머리와 옷을 툭툭 털어 주는 게 전부! 이렇게 일년 내내 비를 맞는 독일에 살아본 사람은 한국의 뚜렷한 사계가 신의 축복임을 실감하게 되지요.

고슬라의 구시가지 건물을 살피며 시내 산책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집들은 대부분 목조가옥이군요. 14세기 이전에 세워진 것들도 많구요. 아! 이곳이 하인리히 하이네의 집으로, 명패 앞에 소담한 꽃이 유난히 사랑스러운 곳입니다. 하이네의 시를 한 수 읊으면 좋으련만, 오늘 따라 황진이의 시조만 맴도는군요.

고슬라의 오래된 가옥들은 안에서 비가 새고 마루가 삐걱거릴 것이 당연한 일. 그래서 대부분 겉은 고풍스럽게 보존한 채, 안만 현대식으로 완전히 뜯어고친 호텔이나 은행이 많습니다.

눈썰미가 있으신 분은 눈치 채셨겠지만, 집 모양이 좀 이상하지요. 1층 보다 2. 3층이 더 넓은 가옥구조. 잘못하면 주저앉을 듯 위태로워 보이는 건축양식은 북부 독일의 목조가옥 특징입니다. 세금 산출 기준이 1층의 넓이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에 2, 3층이 더 넓도록 디자인된 거죠. 언뜻 보아서는 위쪽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지만, 수 백년 동안 거뜬히 버텨오고 있다는 점에서 독일건축의 정확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옛 가옥 사이를 걷다가 고요한 안뜰로 들어서면, 자그마한 상점들이 나란히 들어서 있어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에 온 듯한 아기자기함 마저 느끼게 합니다. 이렇게 집안에 위치한 상점들은 별도의 쇼 윈도우가 없기 때문에 상점을 홍보하는데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 거리의 유리상자. 고슬라 중심가를 걷다보면, 길 양쪽에 네모난 유리 박스가 있고, 그 안에 가전제품, 장난감, 수공예품 들이 전시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으실 거에요. 전형적인 고슬라 형 디스플레이인 셈이죠. 쇼 윈도우 곳곳에 주렁주렁 매달린 백발 마녀와 빗자루도 고슬라 만의 정취라 할 수 있구요.

중앙광장에서 곧바로 하인리히 2세의 궁전인 황제거성(Kaiserpfalz)이 있는 광장으로 걸어가 보세요. 이 황제의 궁전은 현재 독일에 있는 궁전 중에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2층에 있는 황제의 방과 독일의 역사를 그린 벽화를 자세히 살펴보려면, 입구에 가서 영어로 된 설명서를 요청하면 됩니다. 궁전 앞 난간에서 푸른 정원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의 여유도 잊지 맙시다.

궁전을 나와 마르크트 광장으로 나오니 중세시장의 열기가 한창입니다. 오늘의 축제는 이름하여 카이저마크트(Kaisermarkt). 전국 순회 행사로 매주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장터인데, 중세식 먹거리도 다양하고, 컵 하나, 접시 하나도 완벽히 중세 풍으로 장식되어 있어 타임머신을 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나우와 같이 사먹은 사과튀김은 독특한 문양의 창살에 끼워 주는데, 창살 포크 자체가 골동품이므로, 보증금 2마르크를 내고 반납해야 합니다. 맥주 컵도 둔탁한 놋쇠로 된 것이라 특이해요. 혹 유럽 골동품 잡동사니를 수집하신다면, 보증금을 떼이더라도 기념품으로 가져오시는 건 어떨지?

장터 곳곳에서는, 중세시대의 민속촌 풍경을 재현하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물레를 돌리는 할머니, 빵장수, 뾰족한 구두를 신고 피리를 부는 악사, 마녀의 화형식, 염료를 끓이는 구리냄비 등은 관광객의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어요. 묵직한 흑맥주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촌극을 보고 나니, 어느새 기차 시간.

역으로 가는 길에 기념품 상점에서 은빛 옷의 마녀 인형을 샀습니다. 우중충한 잿빛 하늘, 하염없이 내리는 비, 일광 부족이 만든 가장 독일 적인 기념품이건만, 빗자루를 타고 웃는 마녀의 모습은 쾌활하기만 합니다.

알프스 산맥의 그늘에서 감자를 먹으며 살아가는 독일인. 일광이 부족해서 아이들에게 비타민D 정제를 먹여야 하는 독일인. 그들을 지탱해주는 영혼의 비타민은 이렇게 옛날로부터 거슬러 내려오는 낙천적인 마음인가 봅니다.

나우엄마(nowya2000@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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