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가게 탐방]성은과일 최영택씨

  • 입력 2001년 2월 19일 15시 54분


"사실은 오늘이 저희 아내와 처음 만난 날이예요. 가지 말라고 하는데 겨우 달래고 나왔더니 마음이 무겁네요. 그래도 한 번 와보고 싶었어요. 만나니까 참 좋네요.

주위 사람에게 제대로 권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름다운 1% 선포식도 저녁에 있는 행사겠거니 생각하고 뒤늦게 사무실로 오신 성은과일 최영택 선생님의 계면쩍은 첫마디였다.

"가게에 급한대로 그냥 매직으로 써 붙이고 쇠통으로 저금통을 만들었어요. 좋은 일에 참여하시라고 권하면 손님들 첫마디가 뚱해요."

"그거 딴 데 쓰는거 아니예요?"

"아닙니다. 저희가게는 이 저금통말고도 이익의 1%를 매달 떼어서 보내요. 손님이 내신 돈을 따로 모아서 보내구요, 믿을 수 있을 때 참여하세요.그러다가 어느날 만원짜리를 넣고 가시기도 하더라구요.

어떤 날은 꼬맹이들이 과일을 사러오더니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는 거예요. 야, 여기 돈 넣어야돼, 좋은일 하는거래, 너두 해 빨리. 그야말로 코 묻은 돈 백원을 넣고 가는 아이들 뒷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손님들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모습에서 석류처럼 잘 익은 웃음이 터져나온다.

장사하는 이의 얼굴을 아직은 지니지 못한 것 같아 무심코 물었다.

"과일가게를 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2년이요. 아직 너무 미숙해요."

"그전엔 뭘 하셨는데요?"

너무 선량해 보이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약사였어요, 십일년간… 실은 그전엔 의사였어요."

서울대 의대를 나오고 보훈병원 임상병리과에 근무하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간호 조무원이 다른 혈액을 실수로 내 준 바람에 그만…"

그 때 마침 CBS에 갔다가 그 앞에서 있던 유신 철폐데모에 참여한 것이 기사회 되는 바람에 덜컥 안기부에도 잡혀가셨다고 한다.

의료사고와 공안사건이 겹치며 영영 의사로의 길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그 길을 포기하며 택했던 길이 약사였던 것이다. 다시 뒤깍이 학생으로 중대 약학과에 편입해 자격증을 따고 다른 사람 약국에 근무한 것이 십여년, 그마저 시절이 어려워지며 그만두셨다.

정직하게, 자기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지며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다가 겨우 찾아낸 직업이 바로 과일가게. 지금은 너무 서툴러 두 부부가 매달려 있지만 조금 익숙해 지면 젊은 시절부터 해 온 연극이며 봉사활동을 좀 제대로 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램이었다.

의사에서 약사, 약사에서 과일장사에 이르기까지 그가 겪었을 삶의 신산함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하지 않은 맑고 선량한 얼굴에 갑자기 마음이 눅신해졌다.

누가 저 선량한 웃음뒤에 있는 저 상처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가만히 보니 그의 웃옷엔 지역 파출소에서 붙여준 '시민경찰' 마크도 달려있다.

"시민운동은 잘 모르구요. 오랜동안 같이 모이는 친구들 7가정이 함께 오누이 회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계절마다 장애우 시설에 가요. 함께 갔던 친구 아들이 돌아와 일기에 이렇게 썼다더군요. 더 자주 갔으면 좋겠다고.. 참 기뻤어요"

먹고 노는 기쁨에 비할 수 없는 나눔의 기쁨을 선생님은 이미 삶에서 흠뻑 맛보고 계신 것 같았다. 가시는 길에 명함 한 장을 건네주신다.

"성은 과일 최영택"

그리고 그 위엔 볼펜으로 '1% 나눔의 가게'라는 손글씨가 적혀있다.

'나눔의 가게'라는 작은 현판 하나는 두평 반의 작은 가게에서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며 훈장처럼 붙어있었던 것이다.

"작은 스티커를 만들면 좋겠어요, 명함에 붙이고 다닐 수 있도록. 건넬 때 마다 물어보니까, 주변에 자연스레 권하는 계기가 되서 좋아요"

아내 때문에 자리를 서둘러 일어서는 그의 뒷 모습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만져질 것만 같았다.

글/아름다운 재단 임영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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