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루이'벽 못넘고 싱겁게 끝난 한판

  • 입력 2001년 1월 31일 18시 43분


장면도 흑 8을 본 박지은 3단(18)은 바둑판 바로 위로 고개를 깊게 숙인다. 본격적인 수읽기를 하는 자세. 그러나 1분 남짓 지나자 한숨을 푹 쉬며 의자 뒤로 깊숙히 몸을 담근다.

프로기사들에게는 간단한 수읽기였을 것이다. 검토실에서는 더이상 볼 것도 없다며 검토 자체를 끝내버렸다. 박 3단도 짧은 시간내에 아무 수도 없음을 확인했다.

흑이 장면도 ○로 끊었을 때 장면도 백 1로 좌하귀 흑대마를 씌워 공격한 것이 박 3단의 마지막 승부수. 흑 2에 대해 백 3으로 집요하게 차단했지만 흑 4, 6이 카운터 펀치. 루이 9단의 정확한 응수에 박 3단은 결국 9, 11로 타협하며 후수를 잡고 만다. 순간 흑이 12의 곳에 죽 뻗어 실리를 챙기자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반면 15집 정도의 차이로 벌어졌다.

30일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에서 열린 루이나이웨이 9단과 박 3단의 여류명인전 도전 3번기 1국. 이 바둑은 새해부터 여류명인전과 흥창배 등 2개 기전 결승에서 6번기를 두는 루이 9단과 박 3단의 첫 대국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최근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루이 9단을 상대로 박 3단이 좋은 승부를 벌일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하지만 바둑은 흑의 완승으로 싱겁게 끝나고 있다.

[장면도]

백 1부터 시작된 공격은 백 11까지 실패로 끝났다. 선수를 잡은 흑이 12와 13을 교환한 뒤 14의 곳에 두자 반면 15집 이상 차이가 나는 형세. 더구나 흑 14는 선수. 백이 손을 빼면 ‘가’∼‘마’까지 중앙 백대마가 끊긴다.

박 3단이 곧 돌을 던질 것 같았지만 묵묵히 바둑돌을 옮긴다.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만큼은 루이 9단의 벽을 넘어보겠다고 다짐했건만 바둑 내용이 이상하게 꼬였다. 계속 내뱉는 옅은 한숨. 입술을 살짝 살짝 깨물며 자책을 거듭한다. 아무 희망도 없지만 패배의 쓰라림을 달래는 시간이다.

큰 차이로 이긴 바둑이지만 루이 9단도 빈틈없다. 아마추어 감각으로는 ‘유리한데 좀 심하다’할 정도로 백을 끝까지 조인다. 결국 175수만에 박 3단이 돌을 던졌다.

초반에는 치열한 전투가 주특기인 둘 답지 않게 신중한 포석으로 시작됐다. 흑이 판을 잘 짜놓은 듯 싶었으나 백도 계속 근거리로 따라붙으며 ‘한번만 걸리면 카운터 펀치로 역전시킬’ 찬스를 노렸다.

하지만 몇 차례에 걸친 백의 잔 실수가 승부를 갈랐다. 특별하게 큰 실수가 눈에 띄지 않았지만 평정심을 잃은 듯 사소한 곳에서 삐끗거렸다. 마치 잔펀치를 많이 맞은 권투선수가 허무하게 무너지듯이.

큰 승부를 많이 치러본 경험에서 오는 호흡과 반면(盤面) 운영의 차이. 박 3단은 바둑 실력보다 이 차이를 아직 극복하지 못한 것 같았다.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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