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민병욱/‘똥인’

  • 입력 2000년 12월 26일 18시 40분


정당 대변인들이 내는 성명을 보면 그 나라 정치의 수준을 안다고 한다. 진지한 토론을 거친 타협의 정치문화가 성숙한 나라일수록 성명문에 예의와 여유가 담겨 있고 문장 또한 아름답다. 가령 영국이 그렇다. 의안을 놓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해 상대 당을 비난할 때도 “국민의 사랑을 받는 ○○당의 존경해 마지않는 아무개 의원께서…” 등의 극존칭어를 우선 사용한다. 반면 정당간 대립이 첨예하고 토론보다 싸움이 능사인 나라에서는 성명문장이 거칠고 조악하며 직설적이다. 다른 나라의 예를 들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그렇다.

▷지난 4월 총선 무렵 여야 정당들이 낸 성명을 보자. “망나니처럼 고향 어른도 몰라보는 정권의 똘마니”라느니 “철없는 ×이 길거리 약장수도 쓰지 않는 험담” 운운하는 표현을 거리낌없이 ‘내뱉었다’. 재미있는 비유를 든다며 “임신한 이웃집 부인 뱃속의 아이까지 기형아라는” 식의 ‘성희롱적’ 야유도 빠뜨리지 않았다. 상대 당의 당명을 멋대로 바꿔 천민, 헌나라, 헌천년, 콩가루당이라고 하는 것은 예사고 두 당을 한 묶음으로 사생아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엊그제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대변인실이 대변인 문화를 새삼 생각해보게 하는 문서를 각각 내놓았다. 민주당은 신임 김영환(金榮煥)대변인이 취임 기념으로 대변인직을 풍자한 자작 동시를 발표했다. “딸내미들이 나를 놀린다/아빠∼/대변인이 뭐야요/대변이니까 아 똥이네/그러니까 아빠는 똥인이구….” 그는 그러면서 “허구한 날 남을 헐뜯고 박 터지게 싸움이나 하는 대변인이 될 걸 애들은 벌써 짐작했는가”고 자문했다. 똥이란 표현은 뭣하지만 고개를 끄덕일 만한 풍자다.

▷한나라당은 올 한해 자신들이 내놓은 말 중 일부를 ‘촌철살여(寸鐵殺與)의 명언’이라며 발표했다. 야당답게 정부를 비판하고 ‘살(殺·죽이다)’한 문장이 그 속에 담겼다. ‘그래’ 하며 무릎 칠 만한 표현도 있지만 올 한해도 각 당 대변인실이 ‘참 많이도 헐뜯고 싸웠구나’하는 느낌을 준다. 내년에는 바뀌었으면 좋겠다. 가족에게 ‘똥인’이란 소리를 듣지 않는 대변인, 아름다운 말을 골라 하면서도 상대의 잘못을 명쾌하게 짚어내는 성명을 보았으면 좋겠다.

<민병욱 논설위원>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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