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바나나

  • 입력 2000년 11월 16일 11시 50분


▼<바나나>(Bananas, 1971)▼

감독: Woody Allen

출연: Woody Allen, Lousie Lasser

흔히들 우디 알렌은 영화의 천재라고 한다. 감독과 주연을 겸하는 것이 정석인 그의 영화들은 알렌 자신의 개성 있는 외모와 무심코 내뱉듯이 정곡을 찌르는 대사가 생명이다. 앨런의 초기 영화 '바나나'는 대중문화 스타 선거 외교정책 등 미국적 가치에 대한 풍자와 해학이 철철 넘치는 고급 코미디이다. 특히 이 영화는 미국인의 가히 자랑인 사법제도에 대한 냉소적 풍자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당대 제1의 스포츠 아나운서 하워드 코셀 (Howard Cosell)이 남미의 작은 어느 나라 독재자가 살해당하는 현장을 중계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새로 실력자로 부상한 훈타의 지도자가 인터뷰하면서 '바나나 공화국' (banana republic)의 엉터리 정치관을 편다.(바나나 공화국이란 단어는 나라의 경제를 과일수출 관광수입 그리고 외자유치에 의존하는 서반구 열대지방의 작은 나라를 의미한다.) 대중 스포츠의 세계에 느릿느릿 어투에 이따금씩 플라톤과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는 현학적인 어휘를 세인의 비난과 경배를 함께 받았던 코셀을 영화의 첫머리에 등장시킴으로써 대중문화와 지식인의 불가근불가원( 不可近不可遠)한 관계를 암시한다.

뉴욕에서 자란 필딩 멜리쉬는 대학을 중퇴한 채 한 회사의 제품 검사원 생활을 하는, 이렇다 내 놓을 것이 없는 청년이다. 항상 왜소한 체구에 대한 강박관념 속에 사는 그는 사무실에 운동기구를 설치해 두고 전화통을 붙잡고도 간이 농구대에 슛을 던진다. 모든 한국인이 가수이듯이 모든 미국인이 운동선수이다. 영화는 가히 병적인 미국인의 운동 강박증을 조롱한다. 그래도 멜리쉬는 타인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과 애정을 보인다. 지하철에서 무뢰한들이 강도 강간을 일삼아도 모든 승객을 외면하는 것을 보다 참지 못하고 의협심을 발휘하다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어느 날 설문조사를 위해 호구조사를 하던 급진파 여대생 낸시를 만나면서 인생이 복잡해진다. 멜리쉬가 접근하자 낸시는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이 계획하는 건물폭파 작전이 취소되면 데이트를 하겠노라고 장난삼아 약속한다. 둘이 함께 반전데모에 참가하면서 관계가 진전된다. 그러나 멜리쉬가 사랑을 고백하자 낸시가 결별을 선언한다.

실연에 상심한 멜리쉬는 남미의 작은 바나나 공화국, 산 마르코에 간다. 한때 낸시와 둘이서 반군 그룹의 혁명활동에 대해 저술하기로 약속한 바로 그 땅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멜리쉬는 독재자에 의해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으나 반군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이들과 동지가 된다. 이내 멜리쉬는 반군의 지휘부의 일원이 되어 굶주린 군대를 작은 마을의 간이 음식점에서 수백 개의 샌드위치를 주문하여 먹이고 음식값을 떼먹는다. 이러한 희학(戱謔)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멜리쉬는 급격하게 지도자로 부상하고 실로 우습게도 혁명이 성공하여 대통령이 된다. 미국 CIA의 도움을 청하려던 독재자가 실수로 UJA(United Jewish Appeal 유대인 연합)의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인 멜리쉬가 대통령이 되고 민중의 이름으로 봉기한 사실이 무색하게 자신이 새로운 독재자가 될 것을 선언한다.

대통령 멜리쉬는 원조를 얻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오나 정체를 알아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반역죄(treason)로 기소된다. 반전데모에 참가했던 과거 전력 때문인 것이다. 미국에서의 반역죄는 헌법이 직접 그 요건을 규정하는 유일한 범죄이다. 터무니없는 사실적 상황에서 반역죄를 거론함으로써 앨런은 미국의 헌정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검찰측 증인으로 미스 아메리카와 전설적인 CIA의 후버 국장이 나선다. 미인은 오페라 노래로 증언을 대신하면서 멜리쉬가 대통령과 다른 정치철학의 소유자이므로 반역자라고 규정한다. 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증언은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미국 정치와 미인대회가 상징하는 대중문화의 한심한 수준을 폭로한다. 후버 국장은 흑인 여성으로 가장하여 등장한다. CIA의 음지 활동과 평소 여장을 즐겼다는 후버의 변태적 습성을 이렇듯 절묘한 장치를 이용하여 풍자한 것이다. 재판이 한참 진행되는 중에 황급히 한 사내가 법정으로 뛰어들어 살인을 고백한다. 알고 본즉 법정의 번지수를 잘 못 찾은 것이다.

한 증인은 멜리쉬에게 유리할 수도 있는 증언을 하나 법원 속기사가 기록한 내용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멜리쉬는 스스로 자신의 변론에 나선다. 증인석과 변호인 석을 번갈아 이동하면서 자문자답하는 멜리쉬를 판사는 결박하고 재갈을 물릴 것을 명한다. 압권은 재갈 물린 멜리쉬가 자신이 반란을 선동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여자 증인을 반대 심문하는 장면이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멜리쉬의 심문은 계속되고 이상한 소리에 신경이 거슬린 증인은 마침내 자신의 증언이 거짓이었음을 자백한다.

마리화나를 피는 배심이 반역죄의 유죄 평결을 하나 판사는 자신의 이웃에 살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석방한다. NYMBY 현상을 다스려야 할 판사가 오히려 앞장서서 이를 조장한다. 영화는 멜리쉬와 낸시가 하워드 코셀의 사회로 결혼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바나나' 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영화는 허영, 부패, 비능률, 위선으로 얽혀진 미국인의 삶과 법제도를 고발하는 수작이다.

2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난관에 봉착해 있다. 모든 문제가 종국에는 법정에서 판가름나게 되어 있다. 연방법과 주법, 정치와 법, 그리고 대중과 지식인의 이해관계가 얽힌 가운데 법원이 미국과 세계인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대통령을 결정한다. 행여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질 원숭이재판이 되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안경환<서울대 법대 교수> 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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