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대통령의 '개탄' 국민의 '한숨'

  • 입력 2000년 10월 27일 18시 55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엊그제 동방금고의 거액 불법대출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젊은 벤처기업인의 도덕성 타락을 개탄했다고 한다. 청와대측은 어제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금융사건 연쇄발생을 보면 국민의 도덕성이 약화된 것 같다. 정부가 나서서 이를 어떻게 하기는 어렵고 언론에서 도덕성 회복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좋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김대통령 자신이 벤처기업 육성에 심혈을 기울여온 만큼 실망이 크리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대통령의 ‘개탄’에는 이번 사건으로 벤처산업 전체가 위축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담겨있다는 점도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본질을 특정 벤처기업인의 도덕성 타락에서 찾으려는 듯한 논리는 아무래도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검찰수사가 진행중이어서 아직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번 사건의 초점은 감독기관인 금융감독원의 부패와 불법대출된 자금의 용도다. 검찰은 이미 이번 사건과 관련, 로비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금융감독원 임직원 60명의 명단을 확보한 것으로 보도됐다. 또 불법대출액이 천문학적인 숫자로 늘어나고 있어 그중 상당액이 정계와 관계로 흘러들어갔을 개연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같은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이번 사건은 단지 젊은 벤처기업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다. 정부기관의 도덕성 문제이자 국가정책 및 국정운영의 총체적 책임과 연관된 문제다. 무엇보다 개혁의 심장부라 할 금융감독원이 속속들이 썩어있었다. 이제는 썩은 데가 금감원뿐이냐는 소리까지 공공연하게 나오는 판이다. 이래서야 정부의 도덕성을 어디서 찾겠는가.

벤처산업 육성도 그렇다. 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뜻을 좇아 벤처기업의 양적 성장에만 급급한 채 질적 관리에는 등한시해왔다. 이번 사건 역시 잘못된 벤처정책이 낳은 ‘예견된 결과’이다.

그 원인과 책임소재가 이렇듯 분명한데 막연히 국민의 도덕성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초점만 흐리게 할 뿐이다. 더구나 언론의 ‘도덕성 회복 캠페인’은 사리에도 맞지 않는 구태의연한 발상일 뿐이다. 국민의 도덕성을 얘기하기에 앞서 정부의 도덕성과 국정의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사건의 실체와 책임 문제를 명백히 밝히고 철저한 사후대책을 내놔야 한다. 그것이 바른 순서다. 도대체 누가 누구더러 도덕성을 회복하라고 하느냐는 국민의 한숨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