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칼럼]'박지원 게이트'의 뿌리

  • 입력 2000년 9월 4일 19시 04분


‘식사 끝났다. 식당 문 닫아라.’ 93년 문민정부 출범 직후 YS가 “앞으로 (정치자금은) 한 푼도 안받겠다”고 하자 정치권 일부에서 나온 우스갯소리였다. 이런 얘기도 나왔다. ‘그래도 어디선가 판이 벌어지기는 할텐데….’

대통령선거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쏟아 부어진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굳이 YS뿐이었겠느냐만 대선에서 여당후보가 크고 작은 기업들로부터 엄청난 돈을 끌어다 썼으리란 것도 천하가 짐작하는 일. 그런데 느닷없이 한 푼도 안받겠다니 혼자 식사 끝냈다고 식당 문 닫으라는 식이 아니냐는 일종의 비아냥이었다. 물론 대통령이 된 이상 정경유착의 더러운 끈을 단호히 잘라내겠다는 YS의 결심은 지당했다고 할 만하다. 국민도 박수를 보냈다. 문제는 YS의 결심이야 여하튼 ‘판’은 이미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신세지기와 신세갚기'▼

판은 먼 곳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차남은 쓰다 남은 대선자금을 굴리며 청와대와 정부 여당, 권력기관 곳곳에 자기 사람들을 심었다. 정보를 독점하고 국정을 농단했다. 권력을 좇는 부나방들이 그 주위로 몰려들었고 이권과 반대급부가 오갔다. 그가 심은 권력기관의 인맥들이 그의 일탈을 철저히 보호했다. 그는 ‘소(小)통령’이었다.

차남뿐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집사와 가신, 실세 정치인과 장관도 검은 돈을 챙겼다. 대통령 혼자 ‘깨끗한 도덕군자’인 셈이었다. 그러나 가신과 패거리 정치의 ‘군주’로서는 무책임한 처사이기도 했다. 가신과 패거리 정치는 ‘신세지기와 신세갚기’를 그 속성으로 한다. 혈연과 지연 학연 등으로 맺어진 사적 연줄망은 그 보스가 일단 권력을 쥐면 배타적인 이익을 추구하거나 최소한 보상을 요구한다. 한마디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군주가 나몰라라 하니 그 밑의 가신이 어쩌랴. 검은 돈이라도 챙겨 돌볼 수밖에. 이른바 ‘몸통과 깃털론’의 명분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자기 잇속 차리기가 빠질 리 만무하다.

합리적이고 제도적인 절차가 권력의 입김에 맥을 못추는 사회구조에서 힘있는 자와의 연고를 앞세워 문제를 풀려는 시도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줄대기 문화’는 이렇듯 절차와 제도를 무시하는 패거리 정치의 연고주의에서 비롯된다. 법과 제도를 믿을 수 없으니 매달릴 것은 줄대기뿐이다. 절차에 대한 불신과 줄대기의 악순환이다.

▼'끼리끼리의 사슬'▼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에 대해 한나라당은 ‘박지원(朴智元) 게이트’라 이름 붙였다. 잠적했던 신용보증기금 전(前)지점장이 비밀리에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에게 대출보증 압력을 가한 인물이 박지원 당시 대통령공보수석이라고 밝히자 타깃을 좁혀 공세에 나선 것이다. 하기야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의 말처럼 “부탁을 하면 (호형호제하는)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에게 하지 일개 지점장에게 하겠느냐” 싶어 섣불리 ‘박지원 게이트’라 부르기는 아직은 성급한 듯도 싶다. 하나 박장관의 표현대로 ‘일개 지점장’이 근거도 없이 ‘실세 장관’을 배후인물로 공개 거명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모를 일이다.

의혹이야 검찰 수사에서 밝혀질 일이로되 재미있는 것은 문제의 대출과 관련된 박혜룡 현룡씨 형제와의 관계에 대해 박장관이 설명한 대목이다.

“그들의 부친인 박귀수 전의원을 잘 알고 있다. 진도 박씨는 정치적으로 똘똘 뭉쳐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삼촌, 형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는 ‘장파’고 박씨 형제는 ‘계파’로 아예 파가 다르다.”

박장관의 말대로라면 ‘정치적으로 똘똘 뭉쳐 처음 만나도 삼촌, 형님’ 하는 사이에 먼 친척이고 파가 다른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더구나 박씨 형제의 동생은 박장관이 공보수석 시절 데리고 있던 부하직원이었다. 이쯤 되면 박씨 형제가 박장관을 ‘삼촌, 형님’으로 팔고 다녔다고 해도 전혀 어색할 것이 없지 않은가.

우려되는 것은 현 정권 하에서 지연과 혈연의 연고를 앞세워 행세하는 자들이 박씨 형제뿐이겠는가 하는 점이다. 제도와 절차를 무시하는 연고주의를 엄정한 법치(法治)로 근절시키지 못하는 한 한국사회의 후진성은 여전할 것이다. 검찰은 사건의 진상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 ‘끼리끼리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 정권의 도덕성이 걸린 문제다.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