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제12기 기성전 16강전

  • 입력 2000년 8월 29일 19시 05분


25일 오전 10시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 본선대국실. 50대의 김인(金寅)9단과 10대의 젊은 강자 이세돌(李世乭) 3단이 마주 앉았다. 제12기 기성전 16강전.

흑백을 가리니 김9단의 흑번.

대국 시작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두 대국자는 김9단이 흑돌을 하나 집어들자 입을 닫았다. 숨소리가 들리면 미안할 정도의 적막감. 승부의 무게가 대국실을 내리 눌렀다.

이3단의 최근 성적은 51승5패. 승률 91%.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 대선배 앞에서 행동거지는 얌전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누구라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시계 바늘을 30여년전으로 되돌리면 김9단은 바로 지금의 이3단이었다.

68년 그의 승률은 50승 6패. 당시의 김9단은 지금의 이3단보다 더 천하무적이었다.

초반부터 김9단의 장고가 이어졌다. 그는 소걸음처럼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이에 비해 이3단은 속기로 서슴없이 돌을 내려놓고 있었다.

10여수 정도 진행됐을까. 김9단은 시나브로 담배 한대에 불을 붙인다. 깊숙이 그의 폐 속으로 들어갔던 연기가 흐느적거리듯 나온다.

처음엔 한 두모금 빨더니 그는 어느덧 담배 피우는 것을 잊은 듯 바둑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4분 정도 지났을까. 담배가 필터 가까이 타들어가자 그는 담배 한모금을 더 머금고는 이내 꺼버렸다.

이3단의 속기 탓에 오후 1시 점심시간 전에 100여수 정도 진행됐다. 바둑 내용이 좋은지 김9단의 얼굴이 밝아보였다.

1시간 뒤 이들은 다시 마주앉았다. 오전의 긴장감과는 달리 오후의 나른한 분위기가 대국실을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른해질 때 승부의 신은 슬그머니 다가와 바둑판 위에 내려앉다.

서로 큰 집을 지었기 때문에 바둑이 오후 늦게나 끝나겠다고 생각할 무렵. 중앙 백의 약점을 추궁한 수에 대해 이3단이 반격을 가하자 김9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한참 수를 읽던 김9단은 “허, 거참”하며 탄식을 연발한다.

주춤주춤하던 그가 돌을 내려놓자마자 주르륵 10여수가 툭탁툭탁 두어진다. 외길이다. 김국수의 인중에 땀이 맺히고 있었다. 아마 3단인 기자의 눈에도 흑의 손해가 역력하다.

“아무래도 덤이 안나와.”

오후3시. 갑자기 김국수가 말을 건넨다. 돌을 던졌다는 의사표시. 이3단도 “중앙이 이상했어요. 거기 한칸만 덜 갔다면 미세한 승부였는데…”하고 말문을 열었다. 10분여간의 복기가 끝나고 이3단이 나간 뒤에도 김국수는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 점심 먹고난 뒤부턴 머리가 멍해져서 뭘 두는지 모른다니까.”

혼잣말 비슷한 탄식이 이어진다. 15세에 입단해 42년간 수천판을 둬온 김9단이지만 아직도 패배는 쉽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대국실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그가 던진 마지막 말이었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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