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에선/모스크바]러시아人 '다차'서 휴가中

  • 입력 2000년 7월 10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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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로 접어들면서 모스크바 시내는 눈에 띄게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돼 대부분의 모스크비치(모스크바시민)들이 ‘다차’로 떠났기 때문이다.

‘다차’란 생소한 러시아 말이 처음 소개된 것은 94년 김영삼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때였다. 당시 우리 언론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김대통령 부부를 모스크바 교외의 ‘다차’에 불러 공식회담에서 나눌 수 없었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했다”고 전했다. “다차는 교외의 별장”이며 “‘다차외교’는 ‘사우나 외교’와 함께 러시아의 독특한 정상외교의 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교외서 텃밭일궈▼

이런 보도 때문에 다차를 고관이나 부유층 등 노멘클라투라(러시아의 신흥 특권계층)의 전유물로 여길지 모르지만 실은 다차가 없는 러시아인이 드물 정도. 다차가 일반화된 것은 소련 정권이 국민에게 교외나 시골에 조그만 텃밭과 집터를 나눠주었기 때문.

석유가스대학 교수인 니콜라이 니만(59)은 “나무집을 지어 주말이나 여름 휴가철에 텃밭을 일구면서 보내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다차는 보드카 사우나 발레와 함께 러시아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90년대 초 거센 자본주의화의 물결 속에서 러시아인을 지켜준 것도 다차였다. 살인적인 인플레와 루블화 폭락으로 겨울이 닥칠 때마다 외신들은 ‘식량위기’를 경고했다. 하지만 다차에서 가꾼 감자와 양파로 러시아의 민초들은 가까스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연금생활자인 이리나 예브게니에브나(74·여)는 인플레이션으로 연금이 휴지조각이 되자 아예 다차로 거처를 옮기고 모스크바 시내의 아파트는 외국인 유학생에게 세(貰)를 놓고 살아가기도 했다.

물론 다차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소련시절에도 당간부 등 노멘클라투라는 사냥터까지 딸린 호화 다차를 받았다. 여전히 대통령 등 고위관리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는 모스크바 교외와 유명 휴양지에 있는 전용 다차들.

▼헬기장 갖춘 곳도▼

자본주의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어떤 다차를 갖고 있느냐’는 것이 부의 척도가 되기도 했다. 경영 컨설턴트인 블라디미르 벨랴코프(30)는 한달에 미화로 2000달러 이상 버는 전형적인 신중산층. 최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모스크바 북서쪽에 있는 다차를 현대식으로 수리했다. 그러나 “요즘 주변에 새로 짓고 있는 이웃 다차들에는 헬기착륙장과 테니스코트 수영장까지 딸려 있어 기가 죽는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신흥 졸부들은 서민적인 ‘다차’라는 이름 대신 ‘빌라’라고 부른다”고 소개했다. 다차 때문에 보리스 옐친 전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한때 사이가 어색해졌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 실제로 재임 당시부터 다차를 좋아하기로 유명한 옐친이 대통령전용다차인 고리키9를 비워줄 기미가 없자 부자지간 같다는 푸틴과의 사이가 미묘해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러시아인들의 생활 깊숙이 자리잡은 다차에 얽힌 얘기는 이처럼 끝이 없지만 유라시아 대륙만큼 넓은 러시아인들의 삶의 여유를 보여준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김기현기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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