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새 '기초생활보장제'에 우는 난치환자들

  • 입력 2000년 7월 9일 18시 49분


말기신부전증 환자인 한홍석씨(45·가명)는 1주일에 2∼4차례 병원에 간다. 신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므로 혈액투석으로 체내에 쌓인 더러운 피를 걸러내기 위해서다. 그는 최근 20여년간 살아온 아내와 이혼했다.

김정환씨(27·가명)는 고셔병 환자. 몸에 꼭 필요한 GC효소가 부족해 지방물질이 축적되면서 신경계와 간 골수를 파괴시키는 유전병으로 국내에 환자가 30명이 안된다. 그는 곧 부모에게서 떨어져 나와 혼자 살 계획이다.

한씨와 김씨는 난치성 질환, 또는 희귀병을 앓는 환자. 누구보다도 가족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치료를 계속 받기 위해서는 아내와 이혼하거나 혼자 살 수밖에 없다. 어떤 사정이 있어서일까.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허점〓10월부터 저소득층의 최저 생계비를 국가가 보장하고 무료 의료혜택을 주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된다.

대상은 가구당 재산이 4인 가족은 3200만원 이하, 6인 가족은 3600만원 이하이고 부양 의무자(가족)가 없어야 한다. 설령 부양 의무자가 있더라도 고령 등으로 부양능력이 없는 경우에만 선정대상이 된다. 문제는 재산에 포함되는 주택과 토지가 시가로 평가됨에 따라 종전의 과세표준(시가의 40∼50%) 또는 공시지가(시가의 50%)를 기준으로 삼던 생활보호법보다 대상이 엄격해졌다는 점. 이 때문에 생활보호법에서 생활보호대상자 또는 한시적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됐던 상당수 저소득층이 앞으로는 최저 생계비와 무료 의료혜택을 못받게 됐다.

희귀병 및 난치성 질환자들이 배우자와 이혼하거나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와 단독세대를 만들고 일부러 직장을 갖지 않는 것도 부양의무자인 가족이 없고 재산이 적어야만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난치성 질환자들의 고통〓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으로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은 난치성 질환 또는 희귀병 치료에 큰돈이 필요하지만 강화된 심사기준 때문에 무료 의료혜택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다.

국내 신장병 환자 10만여명 중 만성신부전증 환자는 2만여명. 이 중 생활보호대상자(한시적 생활보호대상자 포함)는 40%(8000여명) 정도이지만 절반 이상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지원대상에서 탈락될 것으로 보인다. 고셔병 혈우병 등의 환자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들은 다른 질병과 달리 치료비와 약값이 너무 비싸 무료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보건복지부 질병관리과 신상숙(申相淑)서기관은 지적한다.

말기신부전증 환자는 평생 1주일에 2∼4차례 병원에 가서 투석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지원대상에서 제외되면 한달 평균 50만∼100만원을 부담해야 한다.

고셔병은 주사제값이 1년에 2억5000만원이나 된다. 본인 부담금이 20%로 이중 절반은 아주대 병원의 고셔기금에서 지원한다. 김씨는 한시적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돼 그동안 본인 부담금의 절반을 국가가 지원해 왔지만 앞으로는 사정이 막막하다.

▽대책은 없을까〓한국신장장애인협회는 지난달 8일 서울 종로구 종묘공원에서 집회를 갖고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난치성 질환자들의 가족해체를 부추긴다”며 가족 및 재산과 관계없이 기초생활보장 혜택을 달라고 요구했다.복지부는 이들에게 300억원을 지원하도록 기획예산처에 요구한 상태. 처음엔 귀를 기울이지 않던 기획예산처도 이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 지원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으나 의약분업과 의보통합 등 보건복지분야에 워낙 많은 예산이 투입된 탓에 재원 마련에 애를 먹고 있다.일본의 경우 고셔병 등 46가지 희귀병과 난치성 질환은 국가가 치료비를 전액 지원하고 있다.

아주대 김현주(金鉉主·유전자 클리닉)교수는 “난치성 질환과 희귀병 환자는 정부 지원이 가장 절실한 대상인데도 국내에선 연구와 대책이 전무한 실정”이라며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송상근기자>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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