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방형남/결코 지루하지 않은 나라

  • 입력 2000년 7월 6일 19시 56분


주한 외국대사들에게 서울 생활이 어떠냐고 물으면 대개 이렇게 대답한다. “네버 보링(Never boring·결코 지루하지 않다)!” 한국에서는 자고 나면 무언가 ‘일’이 터지기 때문에 하루하루 새로운 뉴스를 기대하면서 지낸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 속에는 내일은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고 기다리는 흥분이 담겨 있다.

확실히 한국에는 ‘일’이 많다. 최근에도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해 엄청난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몇 년 전 터지고 무너지고 떨어지는 대형사고 시리즈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끌었던 것과는 경우가 다르지만 한국은 국가의 크기에 비하면 엄청난 ‘뉴스 생산국’임에 틀림없다.

정상회담 이후 바통을 이어받은 ‘북한과 그 지도자에 대한 혼란’ ‘의료대란’ ‘은행파업’ 등도 일 많은 한국의 면모를 보란 듯이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일’의 뒤편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혼란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할 수 없는 암흑상태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정권에서 자행된 천문학적인 부패 덕분에 1억이나 2억원 정도는 돈도 아니라고 치부하게 되었듯이, 나라 전체를 뒤흔들 정도의 ‘일’이 아니면 ‘일도 아니다’라는 잘못된 인식이 슬그머니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우리 자신에 대한 평가도 흔들린다. 지난 달 29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유엔개발계획(UNDP)은 동시에 한국이 관련된 보고서를 발표했다. 한국을 포함한 29개 선진국들의 모임인 OECD는 한국이 미국 호주와 함께 뇌물방지협정의 기준에 부합하는 법체계를 갖춘 모범국가라고 평가했다. 영국 스위스 일본 등이 기준에 미달하는 국가로 분류된 것과 비교하면 대견한 일이다. 반면 UNDP는 평균수명 교육 소득수준 등을 종합한 ‘인간개발지수(HDI)’ 비교에서 한국을 조사대상 174개국 가운데 31위에 올려놓았다. 당당한 OECD 회원국인 한국의 삶의 질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HDI가 OECD 회원국의 범위를 벗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이 OECD에 가입할 때 “마침내 선진국의 사교클럽에 들어갔다”고 강조하던 정부관리들의 외침은 무엇이었던가.

최근 한국은 인터넷 분야의 비약적인 성장을 자랑한다. 국내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인터넷 사용인구는 1000만명을 넘어 ‘6대 인터넷 강국’이 됐다. 그러나 미국의 정보통신분야 조사업체인 메탈그룹이 47개국을 대상으로 지식인력 세계화 경제활력 디지털경제화 기술혁신력 등을 종합해 조사한 ‘신전자경제지수’에 따르면 한국의 랭킹은 38위에 불과하다. 양은 많지만 질은 별 게 아니라는 얘기다.

무엇이 우리를 결코 지루하지 않은 ‘일’에 치여 갈팡질팡하게 만들었을까. 국민적 합의에 의해 선정된 목표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60년대 70년대에 우리가 일사불란할 수 있었던 것은 ‘잘 살아보세’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휴가에는 모두가 한국이 지향해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를 곰곰 생각해 봤으면 한다. 그래야 ‘일’이 줄어들고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방형남기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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