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의 옛그림 읽기] 이재관의 '오수초족도'

  • 입력 2000년 7월 4일 18시 30분


나른한 초여름 오후 하늘 맑고 사위가 고즈넉한 날, 나이 지긋한 선비 한 분이 깜빡 낮잠이 들었다. 걷은 휘장 사이로 살펴보니 평상 위에 놓인 책 더미에 윗몸을 기대고 왼쪽 다리를 오른쪽 무릎에 걸친 채 그대로 오수삼매(午睡三昧)에 빠졌다. 아마도 책을 읽다가 잠깐 무거운 눈꺼풀을 쉰다는 게, 그만 ‘새 소리 오르락내리락 하는 중에 낮잠이 막 깊이 든(禽聲上下 午睡初足)’ 모양이다. 이곳은 깊은 산 속 시골집이다. 그것은 마당에 낀 푸른 이끼를 보아 짐작이 되니 여간해서 찾아오는 손님이 없는 것이다. 고요함과 한가로움, 느긋함과 편안함이 화면에 스며든다.

◆한가로움-느긋함 화면에 스며

‘오수초족도’는 당경(唐庚·1071∼1121)이라는 사람의 글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산은 태고인 양 고요하고/해는 소년처럼 길기도 하다/내 집이 깊은 산 속에 있어/매양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때면/푸른 이끼는 섬돌에 차 오르고/떨어진 꽃 이파리 길바닥에 가득하네/문에는 두드리는 소리 없고/솔 그늘은 들쭉날쭉하니/새 소리 오르내릴 제/낮잠이 막 깊이 드네.’ 서안(書案)에 가득 쌓인 책을 보니 지난 세월 선비가 공부한 내력을 알만한데, 저 이는 분분한 세상사를 접어두고 애써 한적한 곳에서 맛을 찾았다.

작은 기와집은 늙은 소나무와 석벽(石壁) 사이에 자리했다. 마당은 물 뿌린 듯 정갈하고 이마가 빨간 학 두 마리가 신선경인 양 소나무 아래 어슬렁거린다. 티없이 해맑은 표정의 동자가 다로(茶爐)에 불을 지피다가 이제 막 고개를 돌려 한가롭게 울려 퍼지는 학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잠시 후면 선비는 깨어나 차 한 모금을 찾을 것이다.

글 내용이 ‘이윽고 산의 샘물을 긷고 솔가지를 주워/쓴 차를 달여 마시고/마음가는 대로 ‘주역’ ‘국풍’ ‘좌씨전’과 ‘태사공서’/그리고 도연명, 두보의 시와 한유, 소식의 글 몇 편을 읽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짙은 묵선으로 단조로움 없애

화가는 하늘이며 마당을 모두 여백으로 깨끗이 비워 놓았다. 선비의 심사가 무욕해서 집 뒤 대나무처럼 속이 비었으니, 맑고 자연스런 여백이 아니고서야 이렇듯 청정한 분위기를 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림은 멋도 있어야 한다. 노송의 둥치와 가지 곳곳에 짙은 묵선을 더해 단조로움을 깼고, 뿌리와 가지 끝은 붓질을 짐짓 날카롭게 갈지(之)자로 휘갈겨 마무리했다.

반면 오른편 석벽은 너그러운 붓질이 푸근하다. 선을 모두 물기가 넉넉한 붓으로 힘들이지 않고 쓱쓱 그려내서 이따금씩 눕는 붓질과 어울려 더욱 편안한 느낌이다. 화제 끝에 찍은 인장은 ‘筆下無一點塵(필하무일점진)’이다. ‘붓 아래 세속의 티끌 한 점도 없다.’ 하루 맑고 한가로우면 그 하루가 신선이니까.

오주석(중앙대 겸임교수)josoh@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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