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는 살아있다]'피터 래빗'

  • 입력 2000년 6월 23일 19시 08분


《콩쥐와 미키마우스, 곰돌이푸, 백설공주…. 한 장의 이미지로 머릿속에 남는 동화책 캐릭터들은 책 그 자체다. 왜 어떤 캐릭터들은 잊혀지는데 어떤 캐릭터들은 1세기를 넘기면서까지 사랑받는 것일까. 동화작가이자 연구자인 김서정교수가 캐릭터 깊이 들여다보기를 통해 동화의 숨은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편집자 주> 》

저는 피터 래빗입니다.

태어난 지 백년쯤 되지만, 변함없이 말썽을 부리면서 사랑받는 아기토끼지요. 얼마나 사랑받느냐구요?

‘영국의 현대적 신화’로 불릴 정도랍니다. ‘미국에 미키 마우스가 있다면 영국에는 피터 래빗이 있다’라는 말도 있구요. 저를 잘 모르는 분도 계시겠지만, 영국 방방곡곡에는 제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컵과 접시에서부터 커튼과 잠옷에까지 말이에요.

세계 최초로 저작권 보호를 받은 캐릭터가 바로 저라는 거 아니겠어요? 저는 그런 것보다는, 두세 살짜리들도 제 이야기를 줄줄 외울 정도로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이 더 자랑스럽답니다.

그런데 제가 뭣 때문에 그렇게 유명하냐구요? 하긴, 남의 밭에서 채소나 훔쳐먹는 도둑 토끼 이야기가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분개하는 분들도 계시긴 하지요. 하지만 모르시는 말씀! ‘문학’이란 건 그렇게 도덕교과서처럼 단순하게 판가름할 것이 아니지요.

제가 벌이는 말썽은 어쩔 수 없는 호기심과 넘쳐나는 힘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이건 제 개인의 개성이라기보다는 인류 공통의 본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빠도 맥그리거씨네 정원에 들어갔다가 붙잡혀 “파이 속에 들어가는 신세”가 됐고, 저 역시 그걸 알면서도 거기 갔다가 죽을 고생을 하는 거 아니겠어요.

어른들 눈에는 단순한 말썽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전쟁을 치른 셈입니다. 아이들은 그렇습니다. 그냥 노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전 존재를 다 바쳐 뭔가에 열중합니다. 큰 일 작은 일, 위험한 일 안전한 일 안 가리고 주변 모든 일에 목숨 걸고 달려드는 게 아이들의 본성이고 운명이라면 표현이 너무 거창한가요? 제 이야기는 바로 그 점을 알아주고 보여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아닐까요?

아빠와 달리 저는 파이 속으로는 안 들어갑니다. 달리고 숨고 또 달려서 맥그리거씨 손아귀에서 벗어납니다. 순전히 제 힘으로 저를 구하는 거예요. 그래서 ‘작은 영웅’ 소리도 듣습니다. 원래 영웅은 당대에는 인정을 못 받지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고 기진맥진 돌아온 저를 보고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옷과 신발 잃어버린 것만 걱정합니다. 저녁밥도 안 주고 쓴 약만 먹입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진짜 영웅은 그 정도는 받아들여야지요. 말썽꾸러기 아기토끼는 그러면서 크는 법이랍니다.

그리고 또, 옷과 신발은 다음 이야기에서 사촌 벤자민 버니와 함께 다시 맥그리거 씨 정원에 가서 찾아옵니다. 양파 한 보따리 훔쳐다가 엄마한테 선물까지 한다니까요!

김서정 (동화작가·공주영상정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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